교과서 쓰기를 시작하고 5년째 되던 해 뉴욕으로 출장 왔던 집안 조카아이가 물었다. 삼촌은 어째서 몇년 전에도 쓴다던 교과서를 아직도 쓰느냐고. 할말이 없어서 너네 삼촌이 능력이 그것밖에 안돼서 그런 걸 어떡하느냐고 하곤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교과서들보다 몇가지 면에서 개선된 모델을 정하고, 그동안 실무 컨설팅에서 쌓인 케이스들을 학부 강의에 맞게 다시 쓰고, 연습문제들을 그 바탕 위에서 만들고, 오류를 없애기 위해 유명 교수들에게 돌아가며 읽히고, 다시 고치고…. 결국 1992년에 시작한 천페이지 가량의 교과서는 정확히 7년 후인 1999년에 끝났다. 필자는 여기에서 책 쓰느라 얼마나 수고했다는 애로사항을 쓰려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일에서 순서와 기본 노력이 얼마나 드는가 있는 그대로 얘기를 한번 하고 싶은 것이다.
최근 신문에서 우리 모국 한국경제의 이론적 배경이 되어야 할 어느 전직 교수, 총장이 현 정권의 총애를 받아 문교장관이 된 후에 부끄러운 과거가 드러나면서 그중 외국 교과서를 그대로 베껴서 쓴 한국판 자기 이름으로 낸 교과서를 변명하고자 한 얘기가 너무나 기가 찰 정도여서 여기에 그대로 옮겨본다.
"이같은 방식(베끼는 식)은 당시 관행이었던 데다 서문에 원서를 기초로 했다고 밝혔던 만큼 표절이라는 주장은 적절치 않다."
남의 것을 베끼는 것이 관행이라는 얘기는 읽으시는 분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고 원서를 ‘기초’로 했다는 부분에 대해서 혹시 이 방면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밝힐 것이 있다. 외국에서 학문을 할 때 책을 쓰는 것까지 갈 것 없이 대학생들의 학기 숙제인 논문에서조차 자기 자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면 그것이 설사 한 센텐스일지라도 어디에서 따 온 것이라고 분명히 소스를 밝히지 않으면 그 논문은 F학점을 받는다. 외국 원서의 제목, 목차 순서, 각 단원별 연습문제까지 꼭 같은 것으로 지적되었다는 기사를 읽으며 필자는 이 전직 교수의 소위 저서에 F학점을 주고 낙제시켜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영리하고 시류를 잘 타서 장관까지 한 어느 한 사람의 경우가 아니라 우리 모국의 학문 수준은 사람들의 근본 인간성들이 달라지지 않고는 향상되지 않고 경제의 다음 수준으로의 향상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노태우 정권 때 북방정책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청와대에서 전국 경제학계에 러시아 경제의 전문가를 추천해 달라고 수소문했다는 것이다. 한참 후에 나온 결과는 한국 경제학계에 러시아 경제를 연구한 전문가가 한 명도 없다는 슬픈 얘기였다. 놀라운 것은 그 후에 있은 일이다. 그로부터 몇달후 갑자기 한국에 러시아 경제전문가가 20명 가까이 나타났다는 후문이다. 이 전문가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일까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어느 국책연구기관 책임자로 있는 친구의 얘기다. 한국에서 출세하는 데는 실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 순발력이 필요하다고. 순발력에서 나오는 실력의 수준이 어느 정도일까.
인터넷 산업이 활발하지만 컨텐츠에서 내용이 너무 낮은 수준이라 채산이 맞는 벤추어가 별로 없다는 뉴스 보도는 결국 성실한 연구만이 끝에 가서 이기는 길이라는 진실을 얘기해 준다. 경제에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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