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문학에 있어서 몇 분의 선생님이 계시다. 문학의 길을 운명적으로 방향을 틀어주신 분은 육당 최남선이시었고 문학의 학문적 축대를 쌓게 해주신 분은 무애 양주동 박사였다. 그리고 문학의 분위기의 옷을 멋있게 입는 법을 보여주신 분은 박인환 선생님, 인생의 고뇌와 비애를 알게 해 주신 분은 이현우 선생님, 그리고 인생과 문학정신에 있어서의 꼿꼿한 길을 철저하게 가르쳐 주신 분은 바로 김관식 선생님이시었다.
나는 이 분들의 소맷자락 말미에 붙어있는 끝단추 처럼 보잘 것 없었으나 문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이 분들을 보면 그저 신비하고 좋아서 따라다녔다. 모두 노변에서 만났지만 그립고 그립다.
삼베옷 한 벌 걸치시고 모두 갔으니 나에게는 비애이고 회한이다. 나는 이 분들 덕분에 여러 노 시인을 어린 나이에 일찍부터 알게 되어 눈치로 즐기는 행운을 누려왔으나 지금은 문학이란 동토에서 찬바람에 눈비나 뒤집어 쓰고 동냥질이나 하면서 홀로 서있는 문학의 고아가 된 셈이다.
나는 김관식의 동양정신을 아버지처럼 따라다녔다. 폐허가 된 전후의 서울이 전쟁의 상처를 언제나 치료하게 될런지 아무도 생각을 못하고 있을 때 문인이나 화가 그리고 음악가, 영화관계자들이 명동에 모여들었다. 명동이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웃으면서 비싼 자리를 내어준 셈이다.
거의 하루에 한번씩 하는 김관식의 명동 순찰 때면 만나는 문인들은 모두 긴장해야 했다. 어느 날 돌채다방에서 승려복을 걸치고 여류시인 김혜숙(당시 이대 국문과 재학)씨와 마주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던 시인 고은씨를 보자 “승려가 절마루에 꿇어앉아 걸레만도 못한 정신을 빨고 또 빨 생각은 아니하고 여자를 끼고 다방에 앉아...중략...고이한 놈이로구나!”
대갈일성하며 주먹을 들이대니 그 때의 고은씨는 장삼자락에 당황을 싸들고 줄행랑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후 몇 번의 곡절을 지나 고은씨와 김관식 선생님은 가깝게 지냈다. 동양정신의 만남으로 꼭지가 닿은 것이었다.
고은씨가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연설에서 “저는 기이한 짐승처럼 회색의 장삼자락을 휘저으며 김관식이 파산하는 뒤를 따라서...”라고 했다.
무엇을 의미한 말인가? 그것은 김관식과 같은 위상의 정신주의를 지니고 한민족의 방향 없는 정신적 풍랑과 현실의 고초를 겪으면서 민족 이데아의 고뇌로 문학을 이행한 김관식을 사모한 말일 것이다.
문인들은 김관식을 정신주의의 초기 혹은 민족정신의 이데아의 고뇌자라고 칭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요즘의 문학거리와도 비슷하게 철저한 문학정신도 없이 물질주의와 권위주의와 아부주의와 출세주의가 가득한 현실세계를 대항하여 저항적 의도를 지니고 시인적인 자긍을 끝까지 유지했다.
“재산은 다 없어졌다. 모주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정원에 꽃 가꾸고 책을 읽으며 애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재미로 살았다. 가을이면 짙은 향기를 풍기는 노란 국화꽃잎을 띄워 술을 마셨다. 때로는 생무를 안주로 한 잔 마시고, 배추밭 고랑에 누워 코를 골았다. 옆에는 빈 병과 원고지가 흩어져 있었다.”
미당 서정주의 처제인 김관식 부인 방옥례 여사의 ‘모주 김관식’이란 수필에서 나온 한 대목이다.
나는 구경꾼이었다. 배우고 보았다 한들, 동행하며 느꼈다 한들 내 것이 된 것은 하나도 없다. 안채를 구경하는 싸릿문처럼 훵훵 지나가는 바람을 안고 서서 문학의 질을 한 삼백리 쯤 그냥 가고 있는 것이다. 다만, 가면서 뒤 돌아다 보니 시인의 정신에는 신이 있었음을 볼 수 있고 시인의 마음에는 영이 있었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이 사는 데에 무슨 상이 있으랴.
無償의 有樂을 느끼게 된다.
인생의 진의에는 탄생 보다 소멸이, 창조 보다 멸망이 찬란하다.
시작의 환희나 과정의 박수 보다 비 온 뒤의 화려한 무지개를, 차디찬 목에 목수건을 두르고 나머지 칠백리를 가자. 인류의 허기를 염려하며 농부가 농사를 짓지는 아니한다. 스스로의 생계를 걱정하여 농사를 짓고 지은 농사가 남으면 시장에 내어다가 이웃의 허기를 나누어 메꿔준다.
가자. 칠백리 길을. 처절하게 또 가 보자.
삽날을 세우고 호미 끝을 갈면서...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