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가운의 간호사에게 볼품 없는 야윈 내 팔뚝을 맡겼다. 주사바늘이 내 혈관을 뚫었다. 난 눈을 감았다. 몇 시간 전 TV에 비쳐진 참상이 뇌리를 맴돈다.
9.11 테러는 눈 깜짝할 사이에 110층의 트윈 타워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 버렸다. 이 짧은 시간에 그 건물들 안에서 벌어졌을 천태만상의 아비규환 속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이 주사기를 통해 흘러나간 내 피가 그 어느 사람에게 수혈될지는 모르나 부디 그 사람의 생명을 구해 주길 기도했다. 그리고 그 일을 보고 계셨을 하나님께도 "이 참사가 인류에게 주는 당신의 메시지가 무엇이냐고,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대처해야 하는가 하고, 또 이 나라 지도자에게 지혜를 주고-. 미국의 성조기 물결 속의 애국심 유발은 어쩔 수 없지만 악마 숭배자들과의 전쟁이 최소화되고 승자도 패자도 없는 증오와 복수의 끊임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달라"고 간구했다.
가엾은 우리 인생들 도토리 키 재기, 새옹지마의 힘의 추구, 불과 5분 후의 일도 알 수 없는 존재로서의 초라한 우리들의 모습. 내가 그 중의 하나가 아니라고 누가 감히 말할 것인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 건물들 속의 많은 사망자들과 그의 가족들은 절규하고 있고 그런가하면 불경기로 해고되거나 임시 퇴직자가 되었다가 이번 일로 복직이 되는 희비가 엇갈리지 않는가.
이번 참사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불만뿐이던 마음에 감사함을 갖게 되고 잊었던 하나님을 찾아 교회로 복귀했다 한다. 사람들은 스스로 참을 수 있는 정도의 고통까지는 신을 찾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 직전에 가서야 하나님을 찾는다. 그게 우리 인생들이다. ‘안개 같은 인생’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 같은 인생’ ‘들의 풀 같은 인생’ ‘인생은 칠십이요, 강건해야 팔십’이라는 그 햇수가 무엇이 대수일까. 마음의 진정한 평화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헌혈 후 셔츠의 소매를 내리고 헌혈소 문을 나섰다. 아직도 밖에는 족히 200명은 넘을 듯한 헌혈 지원자들이 길게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 중 그냥 가려던 한 한인에게 "기왕에 온 것 기쁘게 하고 가라"고 일러주었다.
"낯선 타향에서 짧은 귀양살이를 하는 게 인생이요 삶"이라던 고교 동기 소설가 최인호의 표현과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 인생"이라던 성녀 테레사 수녀의 말, 그리고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성경말씀을 생각했다.
우리는 죽음을 공부해야 한다. 그것이 빠를수록 행복한 사람이다. 까까머리 중학시절,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하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순식간에 흰머리가 수북한 오늘을 맞는 게 인생이다.
오늘 하늘이 날 데려간다 해도 육체의 허물을 벗고 천지창조 이전에 있었던 본질(본향)로 기쁘게 갈 수 있는 영혼을 가꾸는, 준비된 죽음을 맞아야 한다. 천도도 진혼제도 필요 없는 그런 영혼을 가꾸어 두어야 한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