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이 혼미해지면 내 입에서는 어떤 말이 튀어나올까?”
어느날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온 화제이다. 우연히도 비슷한 시기에 한 친구는 어머니가, 또 다른 친구는 남편이 중병으로 쓰러져 중환자실에서 며칠간 간호한 이야기를 하던 끝에 나온 화제였다.
환자가 완전히 의식불명 상태이면 아무 반응이 없지만 의식이 왔다갔다하는 몽롱한 상태에서는 잠꼬대 같이 헛소리를 하는데, 이때 대개 평소 가장 마음을 쓰던 내용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평생 집울타리 안에서 가족 뒷바라지만 하던 친구의 노모는 “중환자실에 누워 하루종일 콩나물을 다듬었다” 의식이 가물가물한 중에도 냉장고에 있는 콩나물 상할 것이 걱정이 되었던지 콩나물 얘기만 계속 하는 어머니를 보며, 전문직 종사자인 친구는 ‘콩나물’을 주 관심사로 살아온 어머니의 인생이 갑자기 안쓰럽더라고 했다.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또 다른 친구의 남편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단추를 챙기느라 바빴다.
“이 단추는 별로 안좋은데… 저 단추가 낫지 않을까. 내일까지 납품해야 하는데 작업이 너무 늦어지네”… 죽은 듯이 누워있던 사람이 갑자기 평소와 똑같은 생생한 목소리로 일을 챙기자 한편으로는 섬칫하면서도 “남편이 공장일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저럴까” 싶어 가슴이 아팠다고 그 친구는 말했다.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알것도 없다고 여겼던 어머니, 남편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는 경험을 친구들은 중환자실에서 했던 것같다.
이 이야기를 다른 모임에 가서 하자 여러 사람, 특히 남자들이 “겁난다”고 농담을 했다.
“나는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장담 못해. 절대로 의식을 잃는 일이 없어야 할텐데…(아내 아닌) 다른 여자 이름이라도 부르면 어쩌겠어”
실제로 의사들 말을 들어보면 평소 꼭꼭 눌러뒀던 감정들이 의식이 혼미한 틈을 타고 마구 튀어나와 환자 식구들이 상처를 입기도 한다. 며느리에게 불만이 많던 시어머니는 며느리이름까지 부르며 욕설을 퍼붓고, 자식에게 섭섭했던 노인은 괘씸한 감정을 거칠게 쏟아내 옆에 있는 의사가 민망할 정도라고 한다. 물론 평소 무뚝뚝하기만 하던 남편이 몽롱한 의식중에 아내를 애타게 찾아 아내를 감동시키는 일도 있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가능할까. 9월11일 테러 희생자 가족들이 죽은 사람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남편, 아내, 딸, 아들의 전혀 알지 못하던 모습들을 확인하고는 그것이 또다른 충격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의식이 혼미해져 여과 안된 말들이 입에서 튀어나오듯, 갑작스런 죽음은 미처 덮고 정리하지 못한 삶의 편린들을 여지없이 드러내는데, 메모나 영수증, 청구서, 일기등 소지품들을 통해 모자이크처럼 조각조각 보여지는 딸의, 아들의, 혹은 배우자의 삶의 모습은 가슴 따뜻한 감동도 되고 가슴 저미는 고통도 되지만, 그 모두가 “내가 이 사람을 너무도 몰랐구나” 하는 한가지 사실의 확인이어서 적잖은 아픔이라고 한다.
사람은 산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멀리서 거리를 두고 보면 더 알것도 없는 무미건조한 대상인데, 가까이 가보면 그 특징없어 보이던 산에 갖가지 나무가 있고, 꽃이 피고, 바위투성이로 보이던 계곡에 조잘조잘 개울물이 흘러, 깊이 들어갈수록 알수 없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테러 희생자 가족들은 떠난 사람의 물건을 챙기는 과정에서 전혀 예기치않게 그 사람의 가슴 설레는 ‘비밀의 정원’을 보고, 깊은 우물같은 근심을 들여다보며 “내 아들·딸이, 혹은 아내나 남편이 이런 사람이었구나”를 뒤늦게 배우고 있다고 한다.
네가 떠난 자리에서 낯선 너를 발견한다면, 내가 떠난 자리에는 어떤 내가 서있을까. 내 책상서랍, 내 일기, 내 옷장…으로 드러나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어떤 모습을 남기고 싶은가. 한번쯤은 제3자의 눈으로 나를 돌아보는 일도 필요하겠다. 그리고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다면 내 신문사 동료의 농담섞인 충고 -“절대로 일기를 쓰지 말라”는 말도 참고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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