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동네 뒷산에 올라가 놀 때 하던 장난이 있었다. 저만치 먼저 올라가 뒤에서 올라오는 친구들을 놀려줄 심산으로 오솔길 양쪽의 풀을 함께 묶어서 여러 개의 풀띠를 만들었다. 뒤에 쫓아오던 친구는 그 풀띠에 발이 걸려서 넘어지고 그러면 우리는 함정에 그가 걸려들었다고 박수를 치며 좋아들 했다.
나와 내 친구들은 하루종일 산에서 진달래꽃을 따먹고, 칡뿌리도 캐 먹으며 놀다가 땅거미가 질 때에야 집에 돌아갈 생각이 나곤 했다. 허겁지겁 산등성을 내려오면서 아침에 매놓은 오솔길 풀띠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내가 매어놓은 그 풀띠에 내가 걸려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지는 수가 많았다.
올라갈 때 풀띠에 걸려 넘어진 친구의 충격은 아무 것도 아니다. 몇 배나 더욱 암팡지게 넘어져서 당하고 나면 무릎과 팔꿈치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아팠다. 아침에 넘어졌던 친구를 보고 좋아했던 마음을 금방 후회해 본다. 이것이 자승자박인지 인과응보인지 어린 시절에는 아무 것도 몰랐다.
9.11 테러사건의 잔해처리 문제가 생각보다 빨리 진척되어 몇달 후면 물리적인 외상은 정리되리라는 소식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받은 자존심과 정신적인 충격은 얼마의 세월이 흘러야 치유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지난주 부시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분노의 눈빛으로 테러 지원국가들을 ‘악의 축’이라고 설정지을 때, 많은 국민들은 그에게 큰 지지를 보냈다. 아직도 얼마나 많은 분노의 앙금이 국민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20세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에서 승리한 미국은 그동안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리더 국가로서 막강한 위신을 자랑해 왔다. 그러나 21세기 벽두부터 미국은 자국의 국력과 경제력만으로는 다변화된 세계를 이끌어갈 수 없다는 상황인식의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물리적 힘이 문화적, 종교적 힘의 논리를 우선할 수 없다는 역사적 현실 앞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어느 특정 지역에서 그 민족 특유의 역사상과 역사 인식을 이해하는데는 그 사회에 뿌리내린 문화와 종교의 형성과정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얼마전 세계적인 관심과 눈총 속에 중동지역의 이슬람 종교지도자 50여명이 9.11 테러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을 했다고 한다. 이 회의에서 밝힌 성명서에 따르면 이번 대미 테러는 지극히 ‘정당방위’였으며 "우리 민족이 당한 희생에 비해 그들의 희생은 극히 미미한 정도이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한 사건을 놓고 미주지역과 중동지역의 국민 사이에 극명한 의견 차를 나타내는 대목이다. 이는 국가간의 정치적 문제라기보다는 종교적 영향력을 받은 사회, 문화적 결과라 생각된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면서 세계가 다원화 사회로 바뀌고 있다. 종교도 유일종교에서 종교 다원화 시대로 폭넓게 바뀌고 있는 추세다. 히말라야 정상을 정복하는데 여러 코스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코스를 이용하든 목적지는 정상이고 그 곳에서 발견하는 ‘진리’는 하나일 것이다.
유명한 신학자 한스 큉의 말처럼 "종교간의 평화 없이는 세계 평화는 있을 수 없고, 종교간에 대화 없이는 종교간의 평화가 불가능하다." 이제 종교의 세계사적 역할을 재조명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역사는 반복한다지만 중세의 십자군전쟁 같은 종교전쟁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길 기원하며, 사랑과 정의와 질서와 평등이 하늘나라에서와 같이 이 땅위에도 이루어지길 빌어본다.
내가 묶어 놓은 풀띠에 내가 넘어지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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