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우리 반에 에드워드란 미국 남자 아이가요, 오늘요 저를 약올려서요, 제가요, 한국 태권도 흉내를 내니까요, 쏘리쏘리 카면서 날더러 프린세스라 하데요. 그놈아가 한국에서 부르던 제 별명을 어찌 알았는지….”
“야, 그건 프린세스가 아니고 플리스라 한거다. 니는 그것도 모르나? 하여튼 니는 공주병이다.”
“오빠야는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아나? 나도 안다. 걔가 분명히 쏘리쏘리라 카고, 끝에 프린세스라 캤다.”
이제 미국에 온지 겨우 한 달이 되어가고 있는 여덟 살짜리 유진이와 오빠 우식이가 부산 사투리로 싸우는 소리이다.
30년 지기 여고 후배가 아이들의 교육 때문에 이곳 워싱턴으로 오고 싶다는 전화를 받고 망설임도 없이 오라고 했던 것은 한국의 교육실정은 차치하고라도 아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넓은 세상보기의 안목도 갖추어 준다는 게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면 염려가 되는 부분이 많았다. 큰아이는 이미 8학년이 되었고 작은아이 유진이는 해운대 앞 바다를 마당 삼아 친구들과 한참 뛰놀던 나이인데 반에 한국 아이가 하나도 없고 당분간은 귀머거리나 다름없이 학교생활을 해야하니 어린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까 걱정이 되었다.
한달 내내 오케이, 노, 노를 일관하며 의사소통을 하던 씩씩한 유진이가 드디어 같은 반 남자 아이가 놀려대는 걸 눈치채고 태권도 이단 옆차기를 행사하려 했던 모양인데 프린세스란 말에 그만 용서를 해주었던 것 같다. 현장에 없었던 나로선 유진이의 손도 우식의 손도 들어줄 수 없지만 남매의 툭탁거림 속에서 무사히 안착했다는 신호음 같은 것을 들을 수 있어 기뻤다.
미국생활을 오래 하다보니 곁에 여러 사람이 오고 간다. 몇년 전, 뉴욕에 살때도 동생 가족이 국제법 공부를 위해 2년을 곁에서 살다 간 적이 있다. 그때 조카의 나이도 유진이와 비슷한 나이였는데 조카는 유진이와는 다르게 아주 수줍어하고 적응속도가 느렸다.
올케는 아이가 안쓰러우면서도 학교가 파할 시간에 가보면 늘 눈자위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아이를 쳐다보면 속이 상하곤 하는 모양이었다. 아이의 낯가림은 한 달이 거의 다 되어 갈 무렵까지 계속되었고 보다 못한 올케가 아주 크게 혼내면서 그렇게 해서 언제 영어를 한마디나 배우겠느냐고 다그쳐대자 울면서 조카가 대답했던 말이 생각난다.
“저 영어 두개 알아요. 혼자 울면요 Don’t cry 하는 거고요, 나랑 어떤 얘랑 둘이 울면요, Oh my goodness! 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그렇게 하던걸요.” 올케와 나는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몰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 후 조카는 학교에 잘 적응했고 한국으로 돌아가 지금은 해리포터를 영어 원본으로 읽으면서 한국의 교과과정도 아주 잘 따라가는 모범생으로 성장해 있다. 그에 비하면 미국 아이들 사이에서 김밥을 자랑스럽게 꺼내 먹으며 권해보기까지 하는 유진이는 머지 않아 미국 아이들을 제압하고 똑똑한 한국 공주의 위력을 과시해주지 않을까 자못 기대가 된다.
주위에서 조기유학이 많은 문제를 낳는 걸 많이 보아온 나로서는 부모가 같이 따라오지 않는 아이들의 유학은 정말 반대하고 싶다. 유진이나 조카가 미국 학교에, 더 나아가 미국사회로 스며들어가 그들과 섞여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성공적인 유학생활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집으로 돌아오면 따뜻한 한국 밥을 지어놓고 사랑의 치마폭으로 감싸안아 주는 부모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유진 아빠는 한국에서는 알아주는 한의사였지만 잠시 본인의 길을 접어놓고 같이 따라와 밤이면 아이들과 카드놀이도 해주고 한국에서는 보지도 않던 청소년 시트콤도 같이 보아주면서 지내는 모습이 그들의 성공적인 유학생활을 점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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