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로 ‘신앙’이란 단어는 “마음을 주다” 또는 “마음을 두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본질적으로 신앙을 논한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무엇에, 또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 것인가를 살펴보는 철학적 행위를 의미한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때다. 결혼한 가정의 절반이 이혼으로 끝나며, 그나마 붙어 있는 가정도 부부 관계가 원만치 않은 가정이 많다 하며, 많은 청소년들이 방황하고, 너무 태연하게 남을 속이고, 서로 죽이고, 적지 않은 한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 현실을 볼 때 무엇인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주된 원인은 부의 축적, 물질 소유와 소비에 너무 많이 마음을 빼앗긴 채 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1980~2000년 사이 미국의 총생산은 3배 가량 늘었으며, 다우존스지수는 약 1,000포인트에서 1만포인트를 능가하는 기록을 세웠다. 소비에 있어서는 1979년부터 1995년 사이 적게는 30%, 많게는 70%가 늘어난 것으로 집계되었다. 현재 세계 인구의 6%를 차지하는 미국은 45%의 자원을 쓰며, 50%의 쓰레기를 산출해 내고 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미국인 3분의 1이 우울하고 부담을 느끼는 마음으로 잠에서 깨어나며, 10~15%만이 참으로 행복을 느낀다고 하며, 부자도 가난한 자도 모두 현재보다 20% 더 많은 부를 희망하고 있어 모두 불만족한 상태에 있다는 한 연구 결과가 주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끝을 모르는 인간의 욕심에 의해 지향되는 삶은 결코 만족 수 없다는 결론을 제시해 주는 듯하다. 그리고 다우지수는 행복의 지수가 아님을 밝혀주고 있다. 1988년 부시 대통령의 선거 매니저였던 애트워더가 뇌암 진단을 받은 후 “나는 부와 권력, 명성 모두를 누렸지만, 마음속에 자리한 허전함을 지울 수 없었다. 내 가족과, 그리고 친한 친구와 보내는 하루 저녁이 내가 쌓은 부 전부보다 더 귀중하다는 진리를 죽을병에 걸린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면서 행복의 근원은 가정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에 있음을 시사했다. 평생 물질에 마음을 두고 산 사람들이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하는 공통적인 말이다.
장기간의 투자를 요구하는 부는 가정의 희생을, 경쟁을 본질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관계의 파괴를 야기하고 있다. 부의 뒷면에는 극히 반인간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부를 쫓는 이들의 모습을 보라. 치솟는 이혼율과 사기. 부모 사랑에 굶주린 청소년간에는 2배로 늘어난 범죄율, 3배로 늘어난 자살율, 3배로 늘어난 살인 범죄, 4배로 늘어난 사춘기 소녀들의 임신율.
세상을 보니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는 말이 진리로 들린다. 가난도, 부도 모두 행복을 주는데는 실패하였다고 누군가 말했다. 부를 축적하더라도, 양심과 가정과 자녀의 영혼은 지킨다는 원칙을 지켜야겠다. “이 셋을 잃고 부를 얻는 다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우리의 목적이 행복에 있다면, 물질에 두어진 우리 마음을 되찾아, 행복의 근원이 되는 가정에 두어야 하겠다. 다우지수가 물거품처럼 사라져도 행복할 수 있는 신앙이 필요하다.
박창형/한인타운 다목적 연장자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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