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구경하는 재미는 이제부터다. 16강에서 탈락하는 팀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4강에 올라가는 팀은 나름대로 뭔가 있는 것이다. 4강에서부터는 운이 아니다. 축구경기의 성공과 실패를 우리의 삶에 대입시켜 보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교훈이 된다.
회교도인 지단은 이슬람 세계의 꿈이다. 아랍이나 아프리카를 여행해 보면 무슬림들이 서양을 욕하면서도 유독 프랑스의 지단에 대해서만은 광적일 정도의 존경을 표하는 것에 놀라게 된다. 독일 월드컵에서 ‘뛰지 못하는 늙은 말’이라는 놀림까지 받아온 그가 오늘(28일) 스페인전에서 프랑스팀의 영광을 되찾는 주인공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팀에는 이상한 체질이 있다. 강자에 강하고 약자에 약한 팀이 프랑스팀이다. 스페인전에서 보인 프랑스팀의 플레이는 스위스와 한국과 싸울 때의 프랑스가 아니었다.
운이란 참 묘한 것이다. G조에서 프랑스가 1등하고 스위스가 2등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스위스가 우크라이나와의 경기에서 보인 망신 중에 망신은 피해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월드컵 사상 승부차기에서 한 골도 못 넣은 것은 스위스가 이번에 처음이다.
쿤 감독이 “나의 생애에서 가장 고통스런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할 정도니까 스위스인들이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받았는지 짐작이 간다. 차라리 스위스가 한국에 지고 16강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같은 불명예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밤 사이 영광이 오욕으로 뒤바뀐 해프닝이고 시계 만드는 나라답지 않은 엉성하고 어이없는 사건이다.
축구에서 승부차기처럼 아슬아슬한 순간이 없다. 1994년 미국에서 열린 월드컵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는 바지오의 연이은 골로 결승에 올라 브라질과 0:0으로 동점을 이루었다. 이때 승부차기에서 국민의 영웅 바지오가 실수해 브라질에게 줄리메컵을 내준 아픔을 이탈리아인들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바지오는 그 충격으로 조기 은퇴했다.
우크라이나의 스트라이커 셉쳉코의 엊그제 실수도 하마터면 영웅에서 역적(?)이 될 뻔한 위기였다. 셉쳉코는 이번에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우크라이나팀을 16강으로 진출시키는데 결정적인 수훈(2골)을 세운 선수다.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스트라이커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수퍼스타 셉쳉코가 스위스와의 승부차기에서 1번으로 나섰을 때 우크라이나 응원단은 환성을 질렀다. 승부차기에서는 보통 제일 먼저 차는 선수가 골을 성공시키면 다음에 차는 상대방 선수가 긴장돼 실수하는 예가 잦다. 그런데 그 셉쳉코가 실수했다. 그래도 우크라이나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스위스가 승부차기에서 한 골도 못 넣는 곱빼기 실수를 연출했기 때문이다. 내가 잘 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실수하면 승리하는 것이 스포츠의 원리다.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한국이 스위스에 이기고 호주가 이탈리아에 이겼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다시 16강 대전에서 한국이 우크라이나를 누르고 호주가 스페인을 누르면 8강전에서 한국과 호주가 맞붙는 흥미진진한 경기가 된다. 히딩크의 제자끼리 싸우는 데다 그가 이번에는 한국을 깨느라고 정신없이 머리를 짜내는 진기한 풍경이 벌어졌을 게다.
자, 이제 월드컵의 우승을 누가 차지할지는 대강 윤곽이 드러났다. 또 그 나라가 그 나라다. 이들 대여섯 나라를 위해 4년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들러리를 서주는 셈이다. 그러나 지금의 응원 열기라면 한국도 20년 후에는 우승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여성들이 여자 골프계를 휩쓸리라고는 20년 전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clee@koreatimes.com
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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