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을 하였다. 산타크루즈 산자락에 숨은 퓨리시마 능곡(陵谷)에 올랐다. 새벽 안개가 신비로운 기운처럼 온 계곡에 충만해 있다. 레드우드 잎새에 밤새 고인 안개이슬이 미풍이 불 때마다 뚝뚝 물방울을 이마에 드리운다. 어느 시인이 이 부서지는 방울들을 물햇살이라 했던가. 오랫동안 도심의 탁한 매연에 시들어가던 폐부를 열고 생명의 기운을 들이마신다. 싱그러운 초록의 장원속에 몸과 마음을 담근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오십 년간, 탁월한 난(蘭) 재배법으로 이젠 세계적 명성을 얻으신 애나 최 여사가 길가에 핀 물망초를 보고 짧은 시를 읊어주신다. 여사는 그간 80여 신품종을 탄생시키고, 한글 이름을 붙여 세계 난 목록에 올리셨다. 그리고 7~8년 만에 한번 피는 신비스런 난들을 매년 다른 종들로 번갈아 피워내며 대상도 수 없이 타셨다.
“평생 난을 키우다보니 화려한 교배종보다는 수수한 원종에 훨씬 마음이 갑니다. 왜냐하면 자연에 가깝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만든 꽃과 자연 그대로인 꽃은 내재적 품위와 향기에서 큰 차이가 느껴져요. 제가 젊어서 명예와 성취감을 위해 꽃을 키울 땐 보이지 않던 그 수수한 풀꽃들이 이젠 내려오면서 눈에 하나 씩 띕니다. 그래서 고은 시인의 ‘그 꽃’을 매일 암송하지요.”
난초에 문외한인 일행들을 위해 여사는 쉽게 설명하신다. “난의 향기는 누가 난의 동반자인가에 의해 좌우되어요. 열대 뉴기니의 난들은 모양과 색깔이 현란하지만 시체 썩는 냄새가 나지요. 거긴 벌과 나비가 없고, 파리 떼들이 꽃가루를 나릅니다. 꽃도 이들을 꾀는 냄새를 뿜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가 하면 밤에만 향기 나는 난도 있어요. 야행성 곤충들을 부르기 위함입니다. 사람의 향기도 공생하는 친구들이 누군가에 따라 달라짐과 같아요.”
나는 식물도 피를 흘린다는 여사의 말에 아! 하고 공감하였다. 사람들은 불가에서 동물의 살생만 금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식물을 함부로 꺾어도 살생이라고 하셨다.
얼마 전 미 동부의 난 전문가가 여사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는 원예학자로 첨단시설을 갖춘 큰 온실에서 난을 오랫동안 재배해온 분이었다. 그런데 똑같은 씨로 꽃을 키워도 자기는 너댓 송이가 고작인데 여사는 수십 송이를 풍성하고 수려하게 여는 게 너무 신기하다고 했다.
그 비결에 대해 책을 쓰고 싶다고 찾아왔다. 그런데 그는 여사의 집 뒤뜰 재래식 온실의 초라함에 또 한번 놀랬다고 했다.
“난 재배의 비결은 꽃 한 송이, 줄기 한 포기마다의 아픔과 기쁨을 읽는 것입니다. 난을 돌보는 마음은 꽃마다의 사정을 알고 한 생명을 깊이 사랑하는 어미 같은 마음이어야 하지요. 저는 꽃송이마다 이름을 불러줍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중략)
석양 무렵 산에서 내려오면서 여사 덕분에 나는 비로소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을 마음으로 읽게 되었다.
김희봉 수필가 환경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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