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카메라가 사용되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아날로그 사진이 찬밥 취급을 받고 있다. 손톱만한 칩 하나에 사진 수백, 수천 장이 들어가는데 롤 필름을 현상소에 맡겨 현상 인화하여 나온 사진은 부피가 커서 보관조차 어렵다.
얼마 전 내가 썼던 기사에 사용했던 아날로그 시대 필름 사진을 정리했다. 그 사진들은 모두 뉴욕 한인사회 이민의 역사가 되어 그대로 보관할 것도 있고 미련 없이 버려야 할 것도 있다. 서머스쿨 발표회에서 한복입고 소고춤 추던 10살짜리 여자아이는 대학원을 졸업한 뒤 약사가 되었고 코리안 퍼레이드에 태권도 시범을 보이던 아이는 어엿한 변호사가 되었다. 건강무료 박람회에서 십여년 이상 예방접종을 해주던 의사는 머리가 허연 노인이 되어 아직도 무료 봉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원 전시회장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있는 두 사람, 휠체어를 탄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박영길 전 문화원장, 두 분 다 이미 고인이 되었다. 미소와 담소를 나누던 그날 그 시간은 기억 속에 고스란히 있는데 뉴욕 문화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이 분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사진 묶음 중에서 언제 보아도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것은 9.11이 일어난 지 몇 개월 후의 사진들이다. 증권거래소에 걸린 대형 성조기의 색상은 그대로 보이는데 건물 주위의 벽과 도로는 흙먼지가 여전히 남아 우툴두툴하다. 그리고 거리마다 검정 쓰레기 봉지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사진 속에 서 있는 사람이나 배낭을 멘 관광객이나 표정이 무겁기 짝이 없다. 아무도 웃지 않는다.
그런데 클로즈업된 얼굴의 한 여성은 그 거리에서 웃고 있었다. 9.11이후 수개월간 가게 문을 열지 못하다가 겨우 청소를 하고 재정비 한 후 월스트릿 인근 거리에 다시 옷가게를 열고 히스패닉 종업원과 함께 인터뷰에 응했던 그녀. ‘이 모든 가게의 물건들이 내 힘으로 마련한 것이라 자랑스럽다, 앞으로 더욱 성장할 것이다’며 무너지고 짓밟힌 터전에서 잡초처럼 일어난 그녀는 희망과 새로운 꿈을 말했었다.
하지만 그 몇 년 후 고혈압이던 그녀는 가까운 사람에게 당한 배신의 충격으로 쓰러진 채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지금도 재활훈련 중이다. 한번쯤 다시 만나야 한다고 늘 생각은 하지만 아직 못 만나고 있다.
시간은 이 순간에도 지나고 있고 모든 것은 순간에 과거가 되어버린다. 흐르는 세월 따라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이 되고 없던 생명이 잉태되어 새로 태어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과거는 지나 가돼 사라지지는 않는다. 언제라도 과거는 현재가 되고 현재는 미래가 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물 사진과 행사 현장 취재 사진들을 보면서 버려지는 사진과 파일에 차곡차곡 쌓여지는 사진의 잣대는 무엇인가를 판단해본다. 보관용 사진 중에는 개인적인 사진도 종종 끼어 있다가 한 두 장씩 튀어나왔다. 같이 찍은 사진 중에 보고 싶은 사람도 있고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사람들의 주관은 저마다 다르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아무리 항변해도 오해받을 수도 있고 심지어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모든 사람에게 이해받고 사랑받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지만 내 사진이 남의 눈에 띄자마자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수모만은 면해야 하지 않나 싶다. 며칠에 걸쳐 아날로그 사진 정리를 끝냈지만 9.11으로 인한 폐허를 딛고 활짝 웃고 있는 그 여자의 사진은 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이 해가 가기 전에 꼭 한번 찾아가 봐야지 결심한다.
민병임 / 뉴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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