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여년 동안 나는 중세 한국 언어의 구조와 한국 언어의 역사적인 고찰을 연구해 왔다. 그런데 한국 언어에 대해서 연구를 하면 할수록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야기에 더욱 더 감격하게 된다.
지금까지 언어학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한글에 대해서 강조한 것은 한글의 독창성, 과학성, 그리고 한글이 다른 민족의 언어를 표시하는 데에 있어 얼마나 적합한가라는 합리성 등에 대해서 주로 주목했다. 그러나 나는 그 보다 더 주목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본다.
‘한글’이란 20세기에 만든 말이다. 1912년 언어학자 주시경이 그때까지 천한 글자라는 뜻의 언문(諺文)으로 불리던 것을 위대한 글자라는 뜻으로 ‘한글’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렇듯 ‘한글’이나 ‘언문’은 세종대왕이 지은 이름이 아니다. 세종이 지은 한글의 원래 이름은 ‘훈민정음’이었다. 그리고 세종이 쓴 한글을 설명한 책 이름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훈민정음 해례’다. ‘훈민정음 해례’는 세종의 ‘훈민정음’과 합본으로 묶어 만들었는데 목판으로 스물 아홉판(약 60쪽) 길이의 책이다. 여기에는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이 세종의 명을 받고 쓴 것으로 한글 자모의 설명과 사용법, 예문 등이 실려 있다. 그리고 그 것을 통해서 한국 언어의 구조를 설명했다.
한국 글자는 물론 한국 언어의 역사는 바로 이 ‘훈민정음 해례’에서 시작한다. 그 이전에 한자로 쓴 글 속에 나온 한글에 대한 글은 어렴풋한 추측과 암시일 뿐이었다. 역사상 세계 어느 문자도 ‘훈민정음 해례’처럼 글자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음성학적인 구조를 설명한 기록이 없다. 한글이 유일하다. 따라서 한글은 한국뿐 만아니라 인류 역사상 가장 귀중한 보물이 아닐 수 없다.
한글은 한글 자체의 우수함 뿐 만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관, 즉 인간의 도리와 합리성, 그리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근대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한글 구조의 원리는 세계 언어학자들이라면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한글 창제의 원리는 그 당시 15세기에는 상상도 못 할 혁명적인 아이디어였다. 한글의 구조에 들어 있는 음성학적인 원리가 얼마나 엄청나고 엉뚱한 발상이었는지 감탄을 하게 된다. 인류 역사상 한글 같은 언어학적인 원리는 처음 나타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한글의 원리는 ‘훈민정음 해례’의 설명을 통해 직접적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현대인이 그 직접적인 설명으로 그 속에 들어 있는 한글의 원리를 확인할 수 있다.
한글 창제가 보여준 또 다른 인류의 가치관은 시대를 막론하고 사회에서 힘없는 약자에 대한 배려이다. 요즘 세상에는 몰라도, 특히 15세기에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그 생각 자체가 가히 충격적이지 아닐 수 없다. 그 시대의 엘리트와 귀족층 사회에서 세종이 이들 약자들의 문맹을 퇴치하려 했음은 세종이 몇 세기를 앞선 위대한 인간임을 말해준다.
어떤 분들은 세종이 왕이니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 한국 왕은 중국 황제 혹은 로마의 시저처럼 절대적인 힘이 없었다. 세종의 힘은 신하와 여러 내각에 의해 제한되어 있었다.
사실 학자를 비롯한 많은 내각들이 심하게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고집을 꺾지 않고 비밀리에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세종이 인간적으로 위대한 점은 철저한 인본주의자이며 용감하며 누구보다도 슬기 있고 대단한 고집으로 옳다고 생각한 일을 성취시켰다는 점이다. 오늘날 이 세상의 모든 힘없는 사람을 배려하는 가치관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바로 한글의 창제가 이 훌륭한 가치관을 상징한다.
로버트 램지 메릴랜드대 동아시아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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