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그 남자는 꽃을 들고 나타났다. 오늘은 흰색 나무상자에 희다 못해 푸른 수국이 화사하게 피어 있고 사이사이엔 빨간 바이어스를 두른 듯한 크림빛 장미가 소담하다. 늘어진 덩굴의 그린 이파리도 싱그럽다.

게이트 옆에 공손히 서 있다가 나를 보곤 반색을 하며 환한 웃음을 지으며 건넨다. 청년의 고른 이빨이 보기 좋다. 손잡이를 받아 들었더니 아주 무겁다. 물먹은 오아시스 세 덩어리를 담은 꽃 상자는 대나무 바구니도 아니고 나무판으로 만들어 흰 페인트를 칠한 것이어서 더 무거웠다. 그걸 들고 버스를 타고 오다니 미안했다.

지난 월요일엔 비취색 도자기에 보랏빛 수국과 흰 장미가 어우러진 환상적인 꽃을 들고 왔다. 수국이 흔한 걸 보니 요즘이 수국철인가보다. 매주 월요일 다른 꽃으로 나를 감탄시키곤 한다. 어떤 날은 야트막한 수반에 짧게 자른 장미 수십 송이를 꽂고 처음 보는 사막꽃을 드문드문 장식한 식탁용 꽃을 가져오기도 한다.

목이 긴 칼라릴리가 아마릴리스와 오는 날도 있고 신부의 드레스 자락 같은 리시안셔스가 눈부시게 오기도 한다. 대개 비싸고 귀한 꽃들이다. 사무실이 다 환하고 꽃을 바라보는 눈도 마음도 화사해진다.

오래 전 대학시절 꽃꽂이 강좌를 이수한 적이 있는 나는 꽃과 인연이 깊은 편이다. 여학교 선생 시절엔 학생들에게 꽃꽂이를 가르치기도 했고, 미국에 와선 꽃집에서 디자이너로 알바도 하였다. 얼마 전까지 시간 여유 있을 땐 일본 꽃선생의 이께바나 클래스를 수강하기도 하였다.

가끔 꽃시장에 가서 꽃을 사다가 집안을 장식하고 남에게 꽃을 나누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남에게 꽃 선물은 받은 적은 거의 없다.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몇 번을 제하곤 말이다. 그것도 교우나 친지들의 선물이었지 남편으로부터 받은 것은 전무하다. 그러던 차에 남성으로부터 매주 꽃을 받는 일이 생겼다.

5월 어머니주일이 지난 다음날 크리스가 꽃을 들고 왔다. 이미 아들아이가 보내준 어머니날 꽃이 있는 터라 썩 반갑지 않았다. 오히려 “뭐 하러 내게 돈을 쓰냐? 네 엄마에게나 쓰지”하고 잔소리했다. 크리스는 씩 웃기만 한다. 그러더니 그 다음 월요일에도 또 다음에도 꽃을 들고 온다.

고맙긴 한데 꽃이 너무 만개하여 이틀이 지나면 시들어 이파리가 저절로 떨어지고 늘어진다.

크리스의 일이 끝나는 늦은 저녁시간 그의 엄마 레베카가 왔다. 크리스는 레베카의 전 남편의 아이인데 엄마와 살고 싶다며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다. 불경기에 양부의 집에 얹혀살게 된 크리스 때문에 레베카는 노심초사했다. 사정을 알게 된 후 도울 길을 찾다가 마침 우리 야구연습장의 볼보이가 그만두게 되어 크리스를 쓰기로 하였다.

제 앞가림을 하게 된 크리스 때문에 걱정을 덜었다며 매우 고마워했다. 레베카는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자 자기가 일하는 샌타모니카의 꽃집에서 남는 꽃을 어레인지해서 내게로 보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받아달라는 것이다.

집 청소 도우미로 다니던 레베카가 그 사이에 새 일을 얻었나보다. 싱싱한 꽃이 아니어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연모의 마음을 품은 남자가 보낸 꽃이 아니어서 실망하였는가? 하나님은 때때로 이런 짓궂은 상황을 만들어서 남자에게 꽃을 받지 못한 나의 평생의 한을 풀어주신다. 나의 꽃 호사 뒤엔 이런 속 이야기가 들어 있다. 꽃을 든 남자가 오늘도 나타날 것이다.


이 정 아 <재미수필문학가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