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온 것을 피부로 느낄 때는 아침저녁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과 나뭇잎들이 색색으로 바뀌는 단풍을 볼 때이다. 우리집 주변을 둘러싼 나무들도 어느새 노란색과 주홍색, 빨간색으로 옷을 바꾸어 입었다. 계절이 별로 바뀌지 않는 것 같은 캘리포니아에서도 이쯤엔 가로수나 얕은 산들 주변에 단풍이 들어, 보는 사람들의 눈을 황홀하게 한다.
요즘 딸네 집에 들를 때마다 나를 신나게 하는 것은 단풍뿐만 아니라 그 집 주변에 빼곡하게 들어찬 참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들이다. 수북이 쌓여 있는 도토리들이 엄지손가락만큼 굵고 실해서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 요즘 그것들을 줍느라 나와 꼬맹이 손주들은 신이 난다.
그 실한 도토리로 묵을 한번 쑤어 보자고 마음을 다 잡았다. 사실 도토리는 그 껍질이 단단해서 깨기가 문제였는데 우연히 도토리 가운데 껍질이 벌어진 것이 있어 까보니 훨씬 쉬웠다.
도토리가 담긴 바구니를 창가에 두었더니 며칠이 지나자 껍질이 벌려지는 것을 발견했다. 우선 껍질 벗긴 것들만 골라내어 물에 담가두었더니 블랜더에 갈기가 쉬웠다.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지만 블랜더에 간 도토리를 채에 받쳐 물을 붓고 저어 주었더니 해맑은 갈색의 진한 물이 나와서 그것으로 약한 불에 약 10분간 끓이니 묵이 만들어졌다.
한시간쯤 지나니 단단하게 되어 맛을 보니 쌉쌀한 게 제법 도토리 묵 맛이 나는 게 아닌가! 생전 처음 시도한 도토리묵이 제법 제대로 만들어졌다는 게 신기해 마음이 들뜨고 행복해졌다.
내가 대여섯 살 무렵 우리 가족은 황해도 연백군에 살았는데 그때 어느 가을날 엄마, 큰 언니와 함께 하루 종일 걸어가서 밤도 줍고 도토리도 줍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 그들은 모두 떠나고 나는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먹어 손주들과 함께 도토리를 줍는다.
어느 날 내가 아이들 곁을 떠났을 때, 우리 손주들도 할머니를 기억하고 그리워할까. 바람이 불자 낙엽들은 우수수 떨어지고 이리저리 흩날리는 것을 보며 우리네 인생도 저 흩날리는 낙엽과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이 스산해진다.
사람들은 떠나고, 또 태어나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고, 또 새봄이 오면 새해는 또 어떤 얼굴로 와서 우리들의 삶을 채색할까.
늙어서 필요한 것은 좋은 음식과 운동과 수질이 좋은 물과 따뜻한 햇빛과 맑은 공기와 적당한 휴식, 그리고 믿음이라고 어느 의사가 말했다. 생각해 보니 이 모두를 다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더 첨가한다면 적당하게 할 수 있는 일과 친구들이다. 나는 단 5분이면 만나고 싶은 친구들을 거의 다 만날 수 있다. 얼마나 복된 일인가!내가 얼마나 더 도토리 줍기를 할 수 있을지 나도 모른다. 건강한 삶은 그때그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찰나를 즐기는 것이다. 딸네를 찾을 때마다 ‘그랜마!’하며 달려 나오는 귀여운 손주들이 있는 한, 아마 나는 행복한 할머니로서 또 도토리 줍기를 할 것이다. 도토리 줍기는 행복을 줍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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