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범 스님<미동부 승가회장, 문수사 회주>
숙제 못하고 학교 가는 학생마냥 준비 없이 가는 노후의 발길이 두렵습니다. 주름살만 쭈드려 쥐고서 남은 생의 겨울 길로 처연하게 들어섰습니다. 골동품은 세월이 갈수록 값이 나가고 소중하게 간직되지만 고물은 갈수록 천대받으며 쓰레기 처리장에 가까워져갑니다.
나이가 이쯤 되고 보니 골동품과 고물 중 어느 쪽의 삶을 살아왔는가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버리기는 아깝고 사용하기에는 불편한 헌 물건이 새 상품에 밀리듯 그렇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젊은 사람을 앞세우고 뒤로 물러서는 자신의 모습을 보아도 헌 물건같이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중국의 어느 시인이 쓴 ‘안면문답(顔面問答)’이란 글이 있습니다. 입과 코와 눈이 눈썹에게 존재의 가치를 묻는 내용입니다. “어느 날 입과 코와 눈이 눈썹에게 묻기를 너는 무슨 역할을 하기에 우리 위에서 거만하게 부리고 있느냐?
그러자 눈썹이 대답하기를 그래 입은 음식을 먹기도 하고 말도 하며, 코는 숨도 쉬고 냄새도 맡지 눈은 세상만사를 다 보고 인식하며 판단하는 등 너희들은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항상 감사하고 있네. 그러나 나는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네 그려! 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다만 조상 대대로 물려준 자리를 지키고만 있을 뿐이라네.”
짧은 내용의 글이지만 조상 대대로 물려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라는 그 대답 속에서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속담에 “눈이 아무리 밝아도 자기 코는 보지 못 한다”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분수를 잘 지키고 있는지, 언제 어디서 나 필요로 하는 사람인지, 그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누구나 자기의 위치를 알고 자리를 잘 지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눈썹이 하는 일이 없다고 해서 눈이나 코나 입 아래로 내려와 붙어 있다면 얼굴 모습이나 그 역할이 어떻게 될까요? 나이가 들수록 육체적으로 하는 생산적인 일은 점점 줄어들지만 경험을 통해서 얻은 상식으로 후배들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예를 들어 눈, 코, 입이 눈썹에서 묻듯 손발이 이목구비에게 물을 수 도 있습니다. 팔다리가 이목구비에게 왜 너희들은 일은 하지 않고 우리에게 시키기만 하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변을 해야 하겠습니까? 눈은 눈대로, 코는 코대로,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그 역할이 다르고 또한 그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 먼저 자신을 돌이켜 볼 줄 알아야겠습니다.
역사는 깊고 희소의 가치가 있는 국보나 보물같이 큰스님들은 연세가 들수록 존경받습니다. 그러나 돈 들여서 폐기처분해야 하는 고물처럼 헌 스님이 되고 보니 죽어 화장비(火葬費)까지 빚지고 가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몸은 나이에 끌려가고 있지만 가는 길을 밝히기 위해 정신연령은 보다 더 젊게 투혼하고 있습니다.
바닷물을 다 마셔봐야 짠 줄 아느냐? 하는 선문답이 있듯이 이젠 그만 헤매고 선정(禪定)을 위해 주로 앉아 있습니다. 고목에 생긴 옹두리처럼 몸과 마음에 흔적이 많지만 그러나 그 흔적이 삶의 경험이요, 상식의 주머니입니다. 존재의 실상은 연기(緣起)에서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형상은 오온(五蘊)에서, 그리고 삶의 의미는 십이연기(十二緣起)에서 올바른 판단은 중도(中道)에서 이해를 했습니다.
수행방법은 사성제 팔정도(四聖諦 八正道)와 육바라밀(六波羅蜜)에서, 수행의 실천은 구차제정(九次第定)에서, 윤회(輪廻)는 유식(唯識)에서 풀려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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