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획 시리즈 / 한인사회 기관·단체 역사탐방 - LA 한인회 <상>
▶ 1965년 유학생 주축 ‘남가주 한인회’로 시작, ‘한인센터’와 통합 거쳐 1982년 현 명칭 사용, 소니아 석 4대 회장, 주류사회와 본격 교류
LA 한인회는 어느덧 불혹을 훌쩍 넘어 46년의 역사를 가진 한인사회대표기관으로 자리 잡아왔다. 창립 반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한인회는 1대 회장단에서부터 현재 32대 회장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한인 인사들이 몸담고 일하며 한인사회 발전에 적지 않은 공헌과 기여를 해왔다. 그 과정은 숱한 스토리와 우여곡절 속에 ‘공’과‘과’가 함께 공존해 온영욕의 역사였다. LA 한인회는 이제 한인사회의 급성장과 함께 글로벌시대의 새로운 이민 트렌드 가운데에서 존재가치를 다시 찾고 역할과 위상을 재정립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LA 한인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미래를 2회에 걸쳐 조명해 본다.
<김형재 기자>
■46년의 역사
현재 LA 한인회는 그 기본적인 목적과 역할을 ‘한인들의 권리와 공익을 보호하고 주류사회와 한인사회를연결하는 역할’로 규정하고 있다. 즉단체의 존재 이유가 미국에서 커뮤니티를 이루고 사는 한인 이민사회의구성원들을 돕고 한인사회가 커뮤니티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하기 위한구심점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LA 한인회는 그러한 면에서 이민초창기 남가주 이민 선조들의 활동구심점이었던 대한인 국민회와 대한인 동지회를 계승해 1960년대 중반첫 활동이 시작됐고, 본격적인 제2의이민물결이 시작된 60년대 후반을거쳐 현재의 LA 한인회관을 마련하게 된 19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태동기와 정착기를 거치게 된다.
■1960년대 태동기
LA 한인회는 유학생 출신이 주축이 돼 1965년 5월1일 결성한 ‘남가주 한인회’로 시작했다. 당시 LA의 한인 인구는 유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그 수도 수천여명 선이었다.
당시 남가주 한인회의 창립멤버는 한국에서 유학 와 1960년대 초반UCLA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조용삼씨(작고), 육사교관 생활을 접고 1956년 텍사스 주립대로 유학 왔던 이경동씨, 역시 유학생 출신으로미국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고 나중에 연세대에서 강의를 했던 김하태 목사(작고), 애국부인회 회장을 지낸 이화목씨(작고), 고려대 출신으로현재의 한인타운 인근에서 주유소를운영했던 송영창씨(작고), 그리고 송씨의 처남으로 의사였던 김창하씨(작고), 그로서리 가게를 운영했던 유재신씨(작고) 등이 있었다. 또 이들과 뜻을 함께 했던 에스더 백씨와 오봉운씨가 있었다.
이 당시 남가주 한인회의 설립목적은 이보다 3년 먼저 만들어졌던 이민선조 후손들의 조직인 ‘남가주 한인센터’ (이사장 김호·회장 송철, 1962년 6월 비영리법인 등록)를 지원하기위한 성격이 강했다.
남가주 한인센터는 한인사회의 화합과 이민자들의 권익신장을 위해 남가주에서 활동하던 국민회와 동지회,애국부인회 등 독립운동 단체 회원들이 중심이 돼 조직됐다. 여기에는초기이민 2세로 중가주 리들리에서씨 없는 복숭아를 만들어 부를 축적한 김호씨(작고)와 동지회 원로 송철씨(작고), 그리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장남이자 영화배우였던 필립 안씨(작고) 등이 참여했다.
한인센터는 1963년 2525 버논 애비뉴에 7만달러를 주고 매입한 자체건물이 있었으나, 재정난으로 융자금상환이 어려워지자 결국 1967년 6월 매각하고 여기서 남은 4만달러는‘건물 매입 때에만 사용한다’는 조건속에 센터기금 관리위원회로 넘겨진뒤 나중에 현재의 한인회관 매입 때종자돈이 됐다.
이처럼 회관 매각은 한인센터와한인회 통합의 계기가 돼 이후 1968년 1월 남가주 한인회와 한인센터는‘재미한인거류민회’로 통합하고 오늘날 LA 한인회 역사를 시작했다. 이후재미한인거류민회는 1972년 남가주한인회로 명칭을 다시 변경했고, LA한인회란 명칭은 1982년부터 공식명칭으로 사용돼 왔다.
당시 조용삼 남가주 한인회 초대회장은 통합단체 초대 회장(이사장송영찬)에 취임했다. 조 초대 회장은이후 한국 농업개발공사 고문으로 근무하기 위해 회장직을 사퇴하고 한국행에 올랐다가 돌아와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졌고, 이처럼 회장 공석사태가 발생하자 이경동 부회장이 회장대행을 맡았다. 때문에 LA 한인회는 초대 회장으로 조용삼ㆍ이경동씨를 동시에 명시하고 있다.
■1970년대 초반 정착기
이후 한인회는 2대 회장에 박규현목사가, 이사장엔 이화목씨가 각각선출됐고, 3대 회장은 김형일 박사가맡았다.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아들인 김 박사는 지식이 풍부한 데다 칼스테이트 계열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1960년대 후반은 가발업을 주축으로 한인들의 부의 축적이 이뤄지는시기였고, 국적항공사의 LA 취항과함께 본격적인 한인 이민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한 때였다.
1971년 4대 회장 선거에서는 소니아 석(작고) 여사가 박준환 후보를 누르고 선출돼 최초의 여성 한인회장이 됐다. ‘여걸’로 통했던 석 회장은 부동산업에 종사하면서호탕하고 과감한 성격으로 남성들을 압도했으며, 타운 일에는거의 대부분 관여할 정도로 활동가였다. 특히 타고난 배짱과 주류사회까지 뻗어 있는 폭넓은 인맥은 한인사회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그러나 석 여사는 이사진과의 불협화음으로 임기 3개월을 앞두고 자진사퇴,5인 대책위가 잔여 임기를 꾸려갔다.
1972년 5대 회장에 오른 조지 최씨는 한인 부동산 업계의 대부로 불리는데 그는 나중에 현재의 한인회관 건물을 매입하는 데도 깊숙이 관여했다. 최씨의 뒤를 이은 6대 회장김종식씨는 한국화약 집안 출신이란사실이 더 유명했다. 그는 또 회장직을 마친 뒤 귀국,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며 한인회장 출신정치인 1호를 기록하기도 했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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