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획 시리즈 / 한인사회 기관·단체 역사탐방 - LA 총영사관 <상>
▶ 1948년 다운타운 첫 업무, 1988년 현 부지 이전, 초대 민희식·최장 안광수 총영사 등 20명 재임, 한때 반체제 인사 감시… 외교·무역‘전초기지’
미 서부에서 한국 정부를 대표하는 재외공관인 LA 총영사관은 올해로 개설된 지 66주년을 맞았다.
총영사를 필두로 영사 등 외교관 21명을 포함 50여명의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는 대규모 공관인 LA 총영사관은 웬만한 국가 주재 대사관에 필적하는 최대 규모 재외공관 중 하나다.
LA 총영사관은 관할 지역도 넓어 남가주는 물론 네바다와 뉴멕시코주까지 담당하고 있고, 공관의 수장인 LA 총영사의 위상도 대부분 대사급 인사가 발령받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워싱턴 DC의 주미대사관보다도 2개월이나 앞서 개관한 LA 총영사관은 지리적, 역사적, 정치·경제·문화적 관점에서 해외 어느 지역보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 외교와 재외동포 정책 집행의 전초기지이다. LA 총영사관이 한인사회와 함께 걸어온 지난 66년의 역사와 현재 및 미래의 역할을 상하로 나눠 조명해 본다.
<김철수 기자>
■공관 66년의 연혁
LA 총영사관은 광복 3년 후인 1948년 LA 다운타운 5가와 브로드웨이에 위치한 현 아케디아 빌딩 4층에서 시작했다. 이후 10년 뒤인 1957년 현 LA 한국문화원 옆 건물인 윌셔와 코크란 코너 11층으로 이전했다가 1988년 현 윌셔와 뉴햄프셔 코너의 청사와 주차장 부지를 500만달러에 매입해 그해 10월 이전을 완료했다.
영사 업무도 초기에는 미국인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일에만 국한됐으나 현재는 민원, 법무, 동포, 경제, 교육, 경찰, 검찰, 관세, 정무, 홍보, 지방자치, 총무로 세분화 됐으며 1980년 한국 문화원, 2000년 한국교육원이 설치돼 한류와 한글의 세계화를 이끌고 있다.
개관과 함께 동포들의 권익보호와 안전 및 국익에 중점을 뒀던 LA 총영사관은 1970년 후반 본격적인 이민자 유입과 함께 영사관의 역할과 기능도 홍보와 기본적인 민원업무에서 탈피해 문민정부와 폭동을 거치며 인터넷과 정보화 시대에 발맞춰 동포단체의 육성 및 한미 지방지자체간 교류 등의 정무업무와 한국기업의 현지 진출 및 투자유치 지원, 무역 등의 경제업무 등 역량을 넓혀가고 있다.
■한국 알리기에 바빴던 초창기
LA 총영사관 처음 문을 연 것은 1948년 11월21일. 워싱턴 DC의 주미대사관이 이듬해 1월에 장면 박사가 취임하면서 문을 연 것과 비교하면 두 달 정도 앞선 것이다. 초대 LA 총영사로는 이승만 정부에서 운수부장을 역임하고 초대 교통부 장관을 맡았던 민희식씨(작고)가 임명됐다. 민 초대 총영사의 둘째 아들은 현재 LA 한인타운에서 형사법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올드타이머 민병수 변호사다.
당시 LA지역에는 초기 이민자를 중심으로 1,000여명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국민회관이 위치한 한인장로교회와 연합감리교회 등 4개의 한인교회가 있었다. 초기 총영사관은 총영사 사무실과 응접실을 겸한 사무직원용 방이 전부인 조촐한 사무실에 불과해 전쟁으로 재정이 바닥난 한국 경제실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초기 총영사와 총영사관의 임무는 미 주류사회에 한국을 알리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무지했고 일부는 아예 일본의 식민지 국가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민 총영사는 벽안의 미국인들을 만나는 자리면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부인과 함께 나가 한국의 장구한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러나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직후 민 초대 총영사는 사임했고 이후 10년간 공석으로 남게 된다.
■윌셔 이전과 1960년대
1957년 총영사관은 현재의 윌셔가 문화원 바로 옆 건물 11층으로 사무실을 옮겼지만 전쟁으로 재정이 고갈된 상태이기 때문에 공관장을 내보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1950년 9월5일 문을 연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의 주영한 총영사가 남가주까지 업무를 겸임했다.
1961년 5.16이 터지고 그해 10월 군 장군출신이었던 안광수 2대 총영사가 부임한다. 그는 1968년 4월까지 거의 7년간을 재직해 현 김현명 총영사를 포함한 역대 20명의 총영사중 가장 긴 재임기간으로 기록된다.
안광수 총영사는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춘 미국통으로 분류됐지만 혁명의 당위성을 홍보하기 위해 군사정권이 보낸 인물이라는 한계 때문에 현지 한인사회와 상당한 거리감이 있었다.
이같은 한인사회의 분위기를 감지한 안 총영사는 ‘민심잡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1963년 한인회의 전신인 코리안 커뮤니티 센터 건물을 매입할 당시 한국정부로부터 지원금1만달러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이후 1968년 5월 노신영 3대 총영사가 부임했다. 노 전 총영사는 이후 안기부장과 국무총리까지 승승장구해 역대 총영사 가운데 가장 출세한 인물로 손꼽힌다.
정통 외교관이었던 노 총영사는 LA 시정부와의 관계증진을 위해 주요 정치인, 시 고위 관계자들과 관저나 호텔에서 교류를 나누는 등 네트웍 위주의 외교를 펼쳤다. 노 총영사 당시 현재 행콕팍에 있는 총영사 관저 건물의 매입이 이뤄진 것도 특이점이다.
■1970년대 격동기와 갈등
1972년 5월 노 총영사의 후임으로 샌프란시스코 총영사였던 소상영 4대 총영사가 뒤를 이었지만 2년간의 짧은 임기로 마감했다.
1970년대 중반 LA 한인사회에서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민주화 요구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고 LA 총영사관의 역할은 자국민 보호보다 소위 현지의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며 보이지 않는 대립각을 형성했다.
외교 연구원 연구관으로 근무하다 1974년 6월 부임한 박영 총영사는 두 달 뒤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총격을 받고 숨지는 사건을 맞았다. 그는 즉각 관저에 빈소를 마련하고 한인들의 조문을 받았다.
반면 그의 뒤를 이어 1976년 6월 부임한 박상두 6대 총영사는 전임 박 총영사에 비해 부드럽고 유연하고 무난한 임기를 보냈지만 박민수 7대 총영사는 재직 시절 한인사회는 말 그대로 ‘격동의 시대’를 방불케 했다.
1979년 7월 부임한 뒤 얼마 되지 않아 한국에서는 10.26 사태가 발생했고, 전두환 정권의 탄생까지 지켜봐야 했다.
1980년 5월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생한 뒤 LA 한인들은 즉각 규탄 성명을 발표하는 한편 총영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때문에 박 총영사는 이같은 반정부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업무였고, 그만큼 부담도 적지 않았다. 그의 재임기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대 한국 대통령으로 처음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 LA를 방문한 것이다. 전 전 대통령은 1981년 1월 당시 레이건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LA를 먼저 찾았으나 당시 호남 향우회 관계자들이 관을 들고 반대 시위를 벌이는 등의 퍼포먼스를 해 LA 총영사관은 무척 당황했다.
1983년 1월 황광한 8대 총영사가 새로 부임했다. 예비역 준장이었던 그는 자신이 신군부의 주체세력임을 암암리에 강조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김기수 9대 총영사 재임 기간에는 LA 한인사회와도 별다른 불협화음 없이 지냈으며 특히 이 기간 현재의 총영사관 건물 매입이 완료됐고 오렌지카운티 순회영사 업무가 시작됐다. 하지만 우정의 종각에 한국전 참전 기념비 유치에 많은 공을 들였지만 정부의 예산지원이 이뤄지지 않아 불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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