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십결(圍棋十訣)에 세고취화(勢孤取和)라고 있어요.’ 케이블 채널 tvN 드라마 ‘미생’ 9회에서 장그래(임시완)가 자신을 포함해 위기에 빠진 동기들(안영이, 장백기, 한석률)에게 넌지시 조언한다.
장그래는 이 말을 이렇게 설명한다. ‘위험한 곳에 과감하게 뛰어드는 것만이 용기가 아니다. 뛰어들고 싶은 유혹이 강렬한 것을 외면하고 묵묵히 나의 길을 가는 것도 용기다. 순류(順流)에 역류(逆流)를 일으킬 때 즉각 반응하는 것은 어리석다. 상대가 역류를 일으켰을 때 나의 순류를 유지하는 것은 상대의 처지에서 보면 역류가 된다. 그러니 나의 흐름을 흔들림 없이 견지하는 자세야말로 최고의 방어수단이자 공격수단이 되는 것이다.’
장그래의 이 말은 이창호 9단이 자신의 에세이 ‘이창호의 부득탐승’에서 했던 말이다. 이창호 9단의 이 말은 ‘위기십결’의 ‘세고취화’를 응용한 일종의 잠언이다.
"우리 기수 왜 이러냐. 아무나 차대는 축구공에, 구박받는 콩쥐에, 푹 절은 배추에, 호구까지."
‘미생’의 모두는 현재 고군분투 중이다. 장그래와 영업 3팀은 요르단 중고차 판매 건으로 위기에 빠졌다. 한석률(변요한)은 일을 미루고 성과는 자신이 취하는 성 대리(태인호)에 대한 분노를 점점 키워가고 있다. 안영이(강소라)는 하 대리와 자원 2팀의 멸시와 무시를 견디는 동시에 과거 직속상관이었던 삼정물산 신 팀장(이승준)과 함께 일하게 되면서 힘들어한다. 장백기(강하늘)는 기본기만 배우고 있는 자신과 업무에 점점 적응해가는 장그래를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낀다. 어디 이들뿐인가. ‘미생’에서 위기가 아닌 인물은 없다.
장그래는 바둑을 뒀던 경험을 통해 현재의 문제를 곧잘 해결해 나간다. 그 바탕이 바로 ‘위기십결’이다. 이 격언은 8세기 중엽 중국 당나라에서 활동한 바둑의 최고수 왕적신(王積薪)이 지은 ‘바둑을 잘 두는 10가지 비결’이다. 당나라 현종은 왕과 바둑을 두는 ‘기대조(棋待詔)’라는 벼슬을 만들었는데, 왕적신이 이 기대조였다. 왕적신의 위기십결은 인생을 살아가는 지침으로 봐도 무방할 터. ‘미생’ 또한 장그래의 입을 빌려 위기십결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위기십결로 ‘미생’을 복기해봤다.
◇첫 번째, 부득탐승(不得貪勝). 승리를 탐하지 말라.
"바둑은 승리를 위한 경기다. 하지만 승리에 집착하다 보면 큰 그림을 놓치고 오히려 실수하게 된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차분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봐야 승리의 기회를 잡는다."
원 인터내셔널에 인턴사원으로 들어간 장그래가 넘어야 할 첫 번째 관문은 PT 면접이었다. 인턴사원들에게는 두 가지 과제가 주어진다. 하나는 ‘동료 한 명과 짝을 이뤄 공통 기획안을 발표하라’, 두 번째는 ‘상대에게 팔 물건을 정하고, 설득하라’는 것이다.
이 면접의 핵심은 상대와 조화를 이루면서 동시에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는 것. 장그래는 인턴사원들 사이에서 표적이 된다. 그가 고졸이라는 걸 안 이들이 그와 짝을 이뤄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게 의도였다. 그들은 승리를 탐하고, 승리에 집착했다.
결과는, 장그래 합격. 장그래가 승리를 원하지 않은 건 아니었을 것이다. PT 면접을 하루 앞둔 장그래는 오 과장에게 말한다. "자존심과 오기만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차이라는 거,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부끄럽지만 일단은, 내일은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장그래는 상대를 이기려고 하지 않았다. PT 준비 내내 그가 했던 행동은 한석률을 이해하고 그와 한팀이 되는 것이었다. 한석률도 마찬가지였다. 장그래와 한석률이 공동 PT에서 상대를 돕고, 개인 PT에서 서로에게 꼭 필요한 물건을 들고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두 번째, 입계의완(入界宜緩). 경계를 넘어설 때는 마땅히 완만하게 하라.
"비록 상대방의 진영이 탐나더라도 너무 깊게 들어가면 오히려 대마를 잡히거나 다른 곳에서 출혈을 입는 경우가 허다하다. 적의 경계를 넘어설 때는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된다."
박 과장 사건을 겪은 영업 3팀에는 새로운 직원이 들어온다. 천관웅 과장이다. 천 과장은 과거 영업 3팀에서 일하면서 오 차장, 김 대리와 함께 동고동락한 사이다. 그런데 천 과장이 어딘가 변했다.
영업 3팀은 박 과장의 비리를 고발했다. 이 일은 최 전무 라인에 타격을 줬다. 천 과장은 최 전무의 지시로 영업 3팀으로 간다. 그는 이를 매우 정치적으로 해석한다. 천 과장은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박 과장의 요르단 중고차 사업 건 서류를 요구한다. 이때 오 차장이 천 과장에게 말한다.
"일을 해, 일을. 회사 나왔으면. 힘 빼지 말고. 사람이 왜 게임에 빠져서 허우적대는지 알아? 게임을 하니까 빠지는 거야. 일하러 와서 게임이나 하고 있다가는 자네부터 게임에 빠질 거야."
회사에 정치가 없을 수는 없는 법. 하지만 대마는 일이다. 일을 놓치면 정치도 물 건너 간다. 천 과장은 정치의 경계를 너무 급하게 파고들었다.
◇세 번째, 공피고아(攻彼顧我). 상대를 공격하기 전에 내 허점부터 돌아보라.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상대를 모르고 나를 알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진다. 상대도 모르고 나도 모르면 항상 위태롭다."
IT 영업팀의 박 대리(최귀화)는 사람 좋다는 말은 듣지만 모질지 못한 성격 탓에 일처리에 애를 먹는 인물이다. 영성실업은 그런 박 대리의 성격을 알고 이용한다. 박 대리를 속이고, 다른 거래처 확보를 위해 원 인터로 보내야 할 물건을 일부러 딜레이 시킨 것. 장그래, 장백기에게 협력처 견학을 시켜주기 위해 영성실업을 찾은 날, 박 대리는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원 인터는 영성실업을 불러들여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박 대리에게는 이번 사건에 관해 설명하라고 한다. 박 대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한다. 함께 자리한 장그래는 속으로 말한다. ‘봉위수기(逢危須棄)’ 위기에 처할 때는 불필요한 것을 버려라.’ 위기십결의 여섯 번째 말이다. 하지만 박 대리는 ‘공피고아’를 택한다.
‘영성실업의 태업은 내 탓이다. 내가 관리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영성실업을 선처해달라.’라는 게 박 대리의 말이다. 박 대리는 자신도 모르고 상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장그래의 도움으로 상대도 알고 자신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만약 박 대리가 봉위수기를 취해 영성실업을 몰아붙였다면 그 또한 회사로부터 신뢰를 잃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공피고아의 태도로 그는 상대의 잘못과 자신의 잘못을 모두 받아들였다. 그의 태도는 영성실업과 자기 자신을 모두 살렸다.
◇네 번째, 기자쟁선(棄子爭先).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선수를 잡아라.
‘子(자)’는 바둑돌을 뜻한다. 작은 몇 점을 버리더라도 ‘선수’를 꼭 잡아내라는 의미.
장그래는 PT 면접을 함께 준비하자는 한석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한석률은 지시하고, 장그래는 따라가는 듯한 형국이다. 가만히 있다가는 한석률의 페이스에 말리고 만다. 더는 두고볼 수 없다. 주도해야 한다.
장그래의 상황을 알고 있는 오 과장은 조언한다. "성취동기가 강한 사람은 토네이도 같아서 주변을 힘들게 하거나 피해를 주지. 하지만 그 중심은 고요하잖아. 중심을 차지해."
장그래는 생각한다. ‘바둑은 기본적으로 싸움이고 전쟁이다. 다가오면 물러서기도 하고 상생을 도모하기도 하지만, 승자와 패자가 분명한 세계다. 그 세계에서 10년을 넘게 살았었다. 패잔병이지만 승부사로 길러진 사람이다. 선수(先手)를 넘기지 않는 선수(選手)다.’
"아이템은 당신이 선정한다. 하지만 PT 디테일은 내가 만든다. 내게 유리하도록. 과정은 공유하지만 지시는 받지 않겠다." 이게 장그래의 선수(先手)다. 장그래는 ‘아이템 선정’이라는 희생은 감수했지만, PT 디테일이라는 선수를 두는 데 성공한다. 장그래의 선제 공격은 합격의 발판이 된다.
◇다섯 번째, 사소취대(捨小就大).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
박 과장(김희원)은 동료들을 비웃었다. 당장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어떤 이득을 위해 일을 하는 게 얼마나 허무한지 알았기 때문이다. 박 과장은 스스로를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재미없네. 돈은 니들이 다 처먹고, 난 월급만 받으면 땡이냐."
영업 3팀에 의해 박 과장의 비리가 밝혀진다. 박 과장이 추진하던 요르단 중고차 사업은 박 과장 자신을 위한 사업, 비리가 덕지덕지한 잘못된 일이었다. 능력 있는 상사맨이었던 박 과장은 사소한 것(돈)을 취하려다 큰 것(삶)을 놓쳐버린다.
장그래는 말한다. ‘정말 안타깝고 아쉽게도 반집으로 바둑을 지게 되면 이 많은 수들이 다 뭐였나 싶었다. 작은 사활 다툼에서 이겨봤자, 기어이 패싸움을 이겨봤자 결국 지게 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하지만 반집으로라도 이겨보면 다른 세상이 보인다. 이 반집의 승부가 가능하게 상대의 집에 대항해 살아준 돌들이 고맙고 조금씩이라도 삭감해 들어간 한 수 한 수가 귀하기만 하다. 순간순간의 성실한 최선이 반집의 승리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순간을 놓친다는 건 전체를 잃고 패배하는 걸 의미한다. 당신은 언제부터 순간을 잃게 된 겁니까?’
어쩌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사소취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치훈 9단은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래 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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