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8년 하와이 주의원 당선 / 알프레드 송 ‘가주 1호’ / 탁월한 의정활동 족적
▶ 1980년대 침체기 4.29폭동 / 정치력 신장 필요성 눈 떠 / 김창준 등 진출 활발해져
<정계 진출 도전사>
미주 한인 이민사회의 정치력 신장 노력과 정계 진출 과정은 그 자체로 시련과 도전의 역사다. 1903년 이민 선조들이 미국 땅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한인 이민사회는 첫 정착지이던 하와이에서부터 정치력의 발판을 이룩한 뒤 지난한 과정을 거쳐 지난해 한인 여성들과 1.5세, 2세 한인들의 담대한 도전으로 주류 정치무대를 향한 정치력 신장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냈다. 111년의 한인 미주 이민사의 험난한 정치 도전의 가시밭길을 되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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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사 55년만에 첫 정계 진출
한인 선조들의 이민의 첫 발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노동자로 시작됐다. 조국의 일본 강제합병을 지켜보면 해방을 맞기까지 모든 커뮤니티의 역량을 항일 독립운동에 쏟아 부어야 했던 한인 선조들에게 주류 정치도전은 차라리 사치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민 50여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한인 선조들의 주류 정치도전이 시작된 데에는 한인 커뮤니티의 이같은 아픈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한인들의 첫 주류 정치 진출의 꿈이 이뤄진 곳은 한인 이민선조들이 첫 발을 내디딘 하와이였다. 한인 이민 역사 55년만인 1958년 한인 장원배씨와 필립 민씨가 하와이주 하원의원에 당선된 것이 한인들의 첫 주류 정계 진출로 기록된다.
특히 한인 최초의 주 하원의원으로 기록된 장원배씨는 주 하원의원을 역임한 이후에도 하와이주 판사를 거쳐 한인 첫 연방 판사에 임명돼 큰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한인 정치도전 역사가 가장 활발한 하와이에서는 다수의 주 의원들을 배출했고, 지난 2000년에는 하와이주 빅아일랜드시에서 해리 김씨가 첫 선출직 시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주와 알프레드 송 의원
하와이에 이어 주류 정치도전의 바톤을 이어받은 곳은 1960년 이후 한인 이민 커뮤니티의 중심지로 부상한 캘리포니아였다. 캘리포니아에서 주류 정치의 문을 두드려 성공을 일궈낸 첫 한인은 한인 정치도전사에 한 획을 그은 알프레드 송(한국명 송호연) 변호사다.
캘리포니아주 의회에 진출한 최초의 한인이자 아시아계 이민자인 알프레드 송 변호사는 의정활동과 법조계 활동에서 뚜렷한 업적과 자취를 남긴 선구적인 인물이다. 아시아계 이민자 커뮤니티의 선구자로 기록된 알프레드 송 전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은 LA 한인타운 윌셔-웨스턴 역에 이름이 부쳐져 역사에 길이 남게 된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송 전 의원은 주 하원의원 재임 4년과 주 상원의원 재임 12년 등 캘리포니아주 의회에서만 16년간의 의정활동을 하면서 주 의회 최고의 법률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고, 캘리포니아의 사법 시스템과 입법부의 개혁을 선도하는 빛나는 업적을 남긴 인물로도 기억된다.
■휴지기와 LA 폭동
한인사회의 정치 도전사에서 1980년대는 긴 휴지기로 기록된다. 알프레드 송 전 의원이 눈부신 의정활동의 성과를 냈지만 1980년대에는 기나긴 정치적 단절기를 맞게 된다.
10여년 간의 긴 휴지기를 거친 한인 커뮤니티는 1990년대에 이르러 정치적 도전 움직임이 거세게 일면서 한인 커뮤니티 곳곳에서 정치력 신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분출하게 되고, 본격적인 정치도전의 새 전기를 맞게 된다.
장기간 침체해있었던 한인사회가 긴 휴지기를 벗어나 잠에서 깨어나게 딘 계기는 4.29 폭동의 아픈 역사적 경험이었다. LA 폭동을 통해 정치력을 갖추지 못한 소수계 커뮤니티의 참담한 현실을 경험한 한인사회는 정치력 신장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정치적으로 각성하는 계기가 됐다.
■한인 연방 하원의원 탄생
1992년 마침내 한인 최초의 연방 하원의원이 탄생했다. 1990년 다이아몬드바 시의원에 당선되며 정계 진출에 성공한 김창준은 1992년 캘리포니아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민주당의 밥 베이커 후보를 누르고 마침내 연방 의회 입성에 성공했다. 최초의 한인 연방 하원의원이 탄생한 것이다.
한인사회가 미국 이민 90년만에 처음인 김창준 의원의 연방 하원 입성은 한인 이민역사에서 한인 정치도전사에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로 기록됐다. 하원에 입성한 김창준 의원은 승승장구를 계속했다.
1994년 에드 테이지 후보, 1996년 리처드 월드론 후보를 연달아 꺾으면서 김 의원은 연방 하원의원 3선 의원을 기록하며 한인 정치 도전사에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거기까지였다. 3선까지 성공했던 김창준은 선거과정에서 모금한 정치자금 이 문제가 돼 결국 정계를 떠나야했다.
1990년대는 김창준 연방 하원의원 배출이라는 괄목할 만한 성과 말고도 오리건과 워싱턴주에서도 새로운 성공기를 이어갔다. 오리건주에서 한인 임용근씨가 주 상원의원에 당선됐고. 워싱턴주에서는 신호범씨가 주 하원에 입성했다. 또 오렌지카운티 가든그로브시에서는 한인 정호영씨가 시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1992년 오리건주 상원의원에 당선된 임용근씨는 이후 주 상원과 하원을 오가며 내리 5선을 기록했고, 같은 해 워싱턴주 상원의원에 당선돼 내리 4선을 기록한 신호범 전 의원은 임용근 전 의원과 함께 한인 정치계의 대부로 불리며 한인 정치 지망생들에게는 멘토 역할을 자임하며 한인 커뮤니티의 정치력 신장에 기여해왔다.
■첫 대도시 한인 시장 탄생
김창준 의원 이후 한인사회는 연방 의원을 배출하지 못했지만, 2000년대 한인들은 미 전국 곳곳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정치도전 성공 사례들을 축적해 냈다.
2000년대 캘리포니아주 어바인시에서 첫 선출직 한인 시장을 당선시키면서 정치력 신장 역사에 또 하나의 큰 진전을 이뤄냈다. 2004년 최석호씨와 함께 어바인 시의원으로 동반 당선된 강석희씨는 2008년 선거에서 어바인 시장에 당선되는 쾌거를 이룬다.
이후 최석호 시의원이 강 전 시장의 뒤를 이어 2012년 어바인 시장에 당선된 데 이어 2014년에도 재선에 성공, 어바인시에서는 4기 연속 한인이 시장에 선출되는 기록을 세웠다.
■한인 2세들의 정치도전
최근 주류 정계 입문을 꿈꾸는 차세대 한인 1.5세, 2세들이 부상하고 있어 한인사회 미래에 새로운 희망이 되고 있다. 뉴저지주에서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도전한 로이 조 변호사가 대표적이다. 이처럼 한인 차세대의 도전은 새로운 기대감을 갖게 해 준다.
<김상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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