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손님이 일주일 동안 집에서 지내다가 떠났다. 한국에서 학부와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있을 때는 용돈벌이로 개인 과외를 했었기에 10대들 만나는 것에 꽤나 익숙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대학원생만 가르치다보니 중고등학생들과 만날 일이 거의 없어 일주일 동안의 고등학생 손님 치르기는 이례적이고 즐거운 사건이었으며 여러 가지로 느끼는 바도 많았다.
손님은 한국에 계시는 친한 선배님의 딸이다. 캐나다에서 혼자 유학을 시작한지 7개월째 접어든 이 여고생 손님은 첫 봄방학을 맞아 엄마의 부탁으로 워싱턴 D.C. 관광도 할겸 우리 집으로 보내지게(?) 된 것이다. 이 아이가 초등학생일 때 내가 잠시 과외 지도를 하기도 했었고, 선배님과도 많이 친한 사이라 1-2년에 한번 한국에서 얼굴은 보고 살았지만, 일주일 내내 단 둘이 지내게 된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엄마와 언니의 중간지점에서 일주일 동안 고등학생 손님과 시간을 함께 하게 되었다.
문제는 나는 봄방학 중이 아니었기에, 본의 아니게 워킹 맘(?)의 생활을 잠시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처럼 노는 시간이라며 공부할 책 따위는 모두 캐나다에 두고 온 지극히 평범한 이 손님에게 도착 첫날인 일요일에 방문했던 스미소니안 항공우주 박물관에서 일단 과학 관련 책을 몇 권 사서 떠안겼다. 그 책들과 내가 빌려준 타블렛을 들고 이 아이는 나를 따라 다녔다. 내가 대학원생들과 미팅을 할 때면 내 연구실 귀퉁이 작은 책상에 앉아 있었고, 내가 강의를 할 때는 강의실 구석에서 책을 보거나 졸고 있었다.
아이가 정말 아이였던 초등학교 1학년 때 제 엄마를 따라서 대학원 연구실에 와서 숙제하며 졸다가 밤 11시가 넘어 비몽사몽간에 집에 따라 나서던 과거를 회상하며 우리는 웃었다. 그 아이가 이제는 내 연구실 구석에서 졸고 있는 시간이 반복되고 있었다. 고등학생이면 꽤 큰 것 같지만, 아직 혼자 운전을 할 수도 없고 낯선 곳에서 대중교통편에 내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내 밥벌이 일상에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한 워킹맘 심정이 되어 저녁 시간이면 먹고 싶다는 한국 음식만 열심히 사 먹이고, 해 먹이고…. 용돈과 먹을 것으로 미안함을 보상한다는 바쁜 부모들 심정이 백퍼(센트)-10대들은 말을 팍팍 줄여 쓴다- 이해갔다.
결국 하루는 워싱턴 D.C. 시내관광을 예약해서 관광버스에 태워 보내고, 마칠 무렵 버스 하차 지점으로 데리러 가기로 했다. 나는 할 일이 많아 같이 관광을 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시내 주요 도로 몇 개가 막혀있어 예정보다 한참 늦게 도착하게 되는데… 휴대폰 전화를 로밍해 오지 않은 여고생 손님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고, 나는 걱정에 피가 말랐다.
손님도 비 오는 길에서 어찌나 목이 빠지게 기다렸는지, 그 수많은 차들 가운데에서도 멀리 신호에 걸려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반응했다.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집에 데려와 손가락을 기름에 튀길 뻔하며 부상 투혼하여 치돈(치즈 돈까스)을 찍먹(소스는 부어 먹는게 아니라 찍어 먹는다는 뜻임)하게 해주고 나서야 비로소 미안한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그날 저녁 둘이 양치질을 하며 알게 된 사실은 내가 일주일동안 함께한 이 여고생 손님은 작년 이맘 때 세월호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이들과 동갑이라는 것이었다. 이 아이가 데리러 오는 나를 마냥 기다렸던 것처럼, 그 아이들도 마냥 기다리고 있었겠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다시 한번 먹먹해졌다.
내가 오랜만에 만나본 그 또래 아이는 몸은 다 컸고 어떤 부분은 어른처럼 행동하지만, 그렇게 아직도 어른을 의지해야 하고, 또 기다릴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어쩌면 아직도 그 배안에는 아직 찾지 못한 몇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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