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을 맞아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있는 외가에 왔다. 네 살까지 완벽한 한국말을 구사해서 어른들에게 종종 칭찬을 받곤 했던 큰 아이가 학교를 들어가자마자 빠른 속도로 잊기 시작하더니 거의 대부분의 대화를 영어로만 하려고 했다.
나름 한국어를 강요하며 아이가 영어로 이야기를 할라치면 엄마 못 알아듣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지만, 급격히 늘어가는 아이의 영어에 비해 그의 한국어 실력은 유아 수준을 넘지 못했다. 아이도 한국어로는 자신이 원하는 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답답해했고, 나도 어느 순간부터 아이의 더듬거리는 한국말을 듣는 것보다 영어로 막힘없이 표현하는 대화가 더 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친정과 가까운 초등학교에 문화체험 제도가 있어 청강생 자격으로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첫째는 생각보다 잘 적응하는 듯 했다. 친구들과 구슬치기를 한다고 구슬을 한 주먹 사간 아이가 처음 배워온 새 단어는 ‘헐’과 ‘대박’ 이었다.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공수-”하며 인사하는 것을 바란 것은 아니다. 언어란 시대를 따라 변하는 것이고, 내가 학교 다닐 적에도 ‘당근’이나 ‘짱’ 같은 유행어를 남발해서 부모님께 혼나기도 했지만, 막상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유행어를 듣는 입장이 되니 심경이 좀 복잡했다.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는 일기 쓰기였다. 아이는 한국어로 쓰는 일기를 매우 힘들어 했다. 미국에서 같으면 후다닥 끝내버릴 것을, 서너 배의 시간을 족히 들이고도 맞춤법이 엉망인 일기장을 내놓았다. 친구들과 대화하는 것도 어느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국에 와서 힘들어 하는 아이를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나중에 아이가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까...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처음 미국에 가서 영어를 배웠던 나이는 다섯 살 이었다. 그 나이에는 다들 그렇듯 영어든 한국어든 스펀지처럼 습득했던 것 같다. 일 년 뒤 한국에 들어가 한국어를 쓰기 시작하면서 미국에서 배웠던 영어를 죄다 잊어버리게 되었고, 몇 년 뒤 다시 미국에 왔을 때 나는 영어를 전혀 못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나이 들어 한국인 학생 하나 없는 학교에서 영어를 배워야 하는 일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쉬운 수학 문제도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틀리는가 하면, 하고 싶은 말을 기껏 생각해도 엉뚱한 문장이 되어버리고, 친구들이 농담을 해도 알아듣지 못해 답답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했던 나는 무척 자존심이 상했고, 바보 같은 나를 바라보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내 평생 영어를 잘하는 날이 과연 오기는 할까... 주저앉아 울고만 싶은 시간들을 버티고 버텼더니 어느 순간 귀가 뚫리기 시작했다. 불가능하게 느껴졌던 대화도 점점 가능해졌다.
시간이 많이 지나 나는 영어로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지금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릴 적 그 정금같이 단련된 시간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언어의 장벽 때문이 다른 직업을 선택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내가 확실히 배운 게 있다. 언어를 배우는 일은 병아리가 알을 깨는 정도의 고통을 거쳐야 가능하다는 것을.
한국에 나와 있는 동안 동생의 부탁으로 한 대학의 여름방학 비즈니스 영어 강좌를 맡게 되었다. 취직을 앞둔 졸업반 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 할 수 있는지 물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한다. 문장을 통째로 외우고 또 외워라. 실력이 늘지 않아 미칠 것 같은 시간을 견디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몇 번은 지나야 귀가 좀 트일거다 라고.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언어를 배우는 쉽고 간단한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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