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영이와 나는 40여년 전 서울에 있는 어느 여자대학 강의실에서 만났다. 기영이는 20세 전후, 나는 30세 전후의 새파란 나이에 사제 관계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후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미국에서 한번, 서울에서 한번 만났던 것 외에는 매년 주고받는 크리스마스카드가 서로의 근황을 알려주는 주 수단이 되었다.
매년 기영이의 카드 안에는 장문의 편지가 들어있다. 가정과 직장생활에 대한 얘기, 열심히 섬기는 교회활동 얘기, 그동안 읽은 책 얘기들 그리고 빠지지 않고 들어있는 것이 친정어머니 소식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한국전쟁 중 남편이 실종되면서 24세 젊은 나이에 혼자되어 핏덩이 기영이를 키우고, 대학교육까지 시켰다.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 덕으로 기영이도 잘 자라서, 대학졸업 후 서울에 있는 외국 고등학교 교무실 실장으로 근무하다가 몇 년 전 은퇴했다. 대학교수로 은퇴한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데, 어머니의 아파트가 길 건너에 있어서 매일 어머니를 찾아뵙는 것이 중요한 일과라고 했다.
어머니의 치매가 많이 진행되어서 무척 힘들다는 소식을 1년 전쯤 편지에서 읽었는데, 지난달 받은 편지에는 어머니의 상태가 매우 위중하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학교 은퇴하면서 맘껏 여행하고 싶었는데, 엄마에게 발목이 잡혀서 지난 5년 동안 1박 2일의 국내 여행도 못했습니다”라고 그는 편지에 썼다. “엄마가 평생 저에게 의지하고 사셔서 하루도 엄마 방문을 빠트릴 수 없는 처지”였다는 것이다.
“정말 속상할 때도 많았어요. 주변에서는 ‘수고한다’'효녀다. 그렇지만 네 행복도 중요하다’‘요양 병원에 보내드리는 것이 어머니에게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저를 아끼는 마음에서 충고를 해주세요. 그런데 나 편하자고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런 시설에 보내기가 참 주저 되었어요. 나도 곧 겪게 될 일인데, 나라면 어느 쪽을 원할까 하고 자문해 보니, 답이 나와요. 가족과 함께 하는 내 집에서 내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지요.”
그러던 중 그의 어머니는 지난 연말 응급실에 가셔서 한달 째 입원하고 계시다고 한다. 병명은 급성신부전인데, 원인은 놀랍게도 대장암이라고 했다.
“의사에게 생명연장은 안하겠다고 했습니다. 떠나실 때까지 고통이 없으시길 바라는 마음이지만, 그 염원도 우리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상황을 매일 매일 받아들이면서, 최선을 다해 엄마를 사랑해 드리는 것이 제 몫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기영이는 어머니 입원 전에 못해보았던“엄마, 사랑해요”라는 말을 요즈음 매일 한다고 썼다. “엄마를 떠나보내는 것이 슬프지만, 엄마가 편안한 곳으로 가신다는 믿음에서, 오히려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합니다.”
기영이는 자기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주위에 너무 많다고 전했다. 그런데 병든 부모, 특히 치매부모를 돌보아야 할 상황에서 ‘효, 불효’라는 잣대를 사용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주위에서 자신을 ‘효녀’라고 하지만, 자신으로서는 어머니를 돌보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아울러 자신의 상황에 맞는 방법을 택한 것뿐이라고 했다.
늙고 병들어 몸도 마음도 망가진 상태에서, 가족과 사회의 짐이 되어 말년을 보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치매를 앓는 것도, 생명이 끝나는 것도 본인 의지대로 할 수가 없다. 우리 삶에서 간편하고 속 시원한 해결책을 낼 수 있는 경우보다 그럴 수 없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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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진 교육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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