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사는 이야기/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미동북부지회 노명섭 회장
어릴 때부터 골목왕초 노릇...3사관학교 입학
정치가 꿈 키우려 82년 유학...89년 정치학 석사
초창기 구두수선부터 델리.네일.식당 등 두루 거쳐
국제향군 일원 작년 세계 최우수지회 선정 보람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에게 지는 걸 무척 싫어했다. 강하고 성격이 급해 싸움도 잦았다. 언제나 지는 법이 없었다. 항상 이겨야 직성이 풀렸다. 늘 왕초(?) 노릇을 한 이유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국 정권 비판 집회를 용납하지 않는다. 종북 좌파 세력 척결 및 배척에 앞장서고 있다. 뉴욕에서 한국군 예비역 최대 조직의 수장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안보의 믿음직한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미 동북부지회 노명섭(64) 회장이다.
■법관을 꿈꾸던 말썽꾸러기
그는 1952년 경북 대구 산이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살다 피난 내려온 곳에서 태어났다. 5남2녀의 막내. 당시 아버지 나이 50세. 늦둥이로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 1956년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남대문초등학교를 다녔다. 사업가인 아버지 덕분에 환경이 부유했다. 태권도는 수준급 야구 등 모든 구기 종목 실력도 탁월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 싸움도 꼭 이겨야 했다. 말썽장이로 자란 이유다. 그렇지만 공부도 열심히 했다. 정의로운 것을 좋아해 장래희망은 법관이었다.
열 살 때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숨졌다. 가정형편은 날로 기울였다. 10년 만에 쫄딱 망하는 꼴이 됐다. 중동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사춘기 때의 일이다. 중학교 때는 투수로 야구선수를 꿈꾸기도 했지만, 학교에 야구부가 없었다. 방과 후에 친구들과 운동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도 그랬다.
아버지 사망으로 가장 자리가 늘 비어있었다. 가정보다는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이유다. 운동하고 공부하며 ‘법관’의 꿈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고3 졸업 때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웠다. 등록금이 없어서 대학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대학 대신에 3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장래희망이 법관이었다.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에 갈 수 없었다. 꿈을 포기할 수 없어 3사관학교에 진학했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육군 장교의 길
그가 3사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등록금이 없어도 국비로 공부를 할 수 있어서다. 졸업 후에 초급대학 자격증을 부여하는 것도 한 요인이었다. 군대징집이 나왔을 때 졸병으로는 군에 가고 싶지 않았다. 어린 시절 골목대장처럼 왕초노릇을 해야만 하는 성격이 그대로 남아있었던 셈이다.
졸업 후에는 5년 복무원칙에 따라 소위 계급을 달고 보병 3사단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1년 후 중위시절엔 비무장지대 GP장을 했고, 2년 후 대위 때는 흔히 공수 9여단으로 알려진 특전사에서 중대장으로 복무했다. 그렇게 5년 동안의 복무를 마치고 1980년 제대를 했다. 그는 군복무 중에도 학업에 열정을 쏟았다.
7년 독학으로 일본어 실력을 쌓았다. 대위 땐 단국대학교로 편입해 ‘정치학’ 학사과정을 마쳤다. 법관을 꿈꾸던 그에게 ‘정치가’가 되고 싶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제대 후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더 큰 세상에서 ‘정치가’의 꿈을 키워나가기 위함이었다.
■파란만장한 삶
그는 1982년 미국에 왔다. 펜실베니아 스크랜턴대학 ‘정치학’과 입학허가를 받아, 유학을 온 것이다. 영어공부는 뉴욕 퀸즈 칼리지에서 했다. 아내는 3개월 뒤에 뉴욕에 왔다. 아내하고는 미국 오기 전 한국에서 중매로 만나 18일 만에 초특급 결혼식을 올렸다. 외모와 성격이 차분한 간호사에게 한 눈에 반한 것이다.
그는 스크랜턴 대학에서 6개월 정도 공부를 하다 뉴욕으로 돌아왔다. 공인간호사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뒷바라지를 위해 식당에서 일하는 아내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사우스 브롱스 소재 일본회사에 취직했다. 공부를 접을 수는 없어 세인트존스로 편입했다. 그 후 1년 뒤 퀸즈와 브루클린 접경지역에 델리가게를 오픈했다. 아내가 다니던 식당에 불이나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이 비즈니스를 시작하게 된 계기다.
개업한지 6개월 동안은 매일 고객들과 실랑이와 싸움을 해야 했다. 술을 공짜로 달라는 고객과 물건을 훔쳐가는 고객들이 주 대상이다. 권총강도를 당하기도 했고 맨 손으로 권총강도를 잡기도 했다. 그렇게 만만치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가게 분위기가 바뀌었다. 고객들이 공손해졌고, 매상도 올랐다. 그 덕에 1988년도에는 아스토리아 지역에 종업원 12명의 네일 가게도 차릴 수 있었다. 델리가게는 90년에 정리했다.
경제적으로 여유를 찾아 1989년 롱아일랜드대학으로 다시 편입해 1991년 정치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91년에는 네일 협회 사무총장도 맡았다. 네일 면허가 필요하게 된 1992년에 앞서 적극적인 로비를 통해 ‘3년 이상 근무증명하면 자격증 자동부여’하는 쾌거도 달성했다. 그 여파로 네일 협회 사무실을 처음 개설했고 회원들의 등록도 폭주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자신의 네일 가게는 한인종업원들이 나가 근처에 사방으로 네일 가게를 차리는 통에 접어야 했다.
그는 브루클린 한인회 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93년에는 한국 국회의원 보좌관 생활도 했지만 수행비서와의 의견대립으로 접어야 했다. 다시 뉴욕에 돌아와서는 올바니에 편의점을 차렸다. 하지만 지나친 단속에 지쳐 4년 만에 접어야 했다. 그래서 한국 대치동에서 ‘일본식 우동식당’을 운영하다 주방장과의 마찰로 6개월 만에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도 우두사이드에 리커스토아를 차려 6-7년 운영하다 건강상 이유로 접었고, 롱아일랜드 미네올라에 델리-커피숍을 차렸다가 가게 앞 버스정류장 이전으로 문을 닫기도 했다.
아내는 장남이 대학에 가자 49세의 나이로 다시 공인간호사 공부를 해서 1년 만인 50세에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 때부터 퀸즈 마운트사이나이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는 “유학을 위해 미국에 온 삶은 초창기 구두수선, 가방수선 판매 등을 시작으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다. 한국까지 오가며 살았던 일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겪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내와 아들, 딸과 며느리, 손녀 등 가족 모두가 건강하게 잘 살고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하다”고 귀띔한다.
■재향군인회 수장
그가 재향군인회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7년. 미 동부특전동지회 회장(1987-1992)으로서 감사를 맡게 되면서부터다. 그 후 사무처장, 육군부회장 등의 경험을 쌓고 지난 2014년 회장에 취임 3년의 임기를 수행하고 있다. 향군의 일원으로서 조국의 충성심과 애국심 더불어 개인의 명예를 위해 충실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침체한 향군의 위상정립과 막강한 향군이 되도록 진력하고 있다.
그는 회장으로서 국가원수로부터 향군활동에 위안을 받거나 경의를 표할 때 보람을 느낀다. 종북좌파 세력척결 및 파타에 앞장서거나 국제 향군으로서 피의동맹을 서로 인식하고 형제라고 부를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부가 인정한 단체임에도 위계질서를 무시하는 단체나 개인을 접할 때는 무척 아쉽게 여긴다. 왜냐하면, 향군에는 제대하면 계급, 나이에 관계없이 똑같은 대우를 하며 조직의 위계질서를 확립해야 함을 개인철학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향군의 일원으로 서로 존중하고 미 동북부지회가 존경 받을 때 보람을 느낀다는 그는 국제향군과의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적극 유지했으며 한인사회의 안보단체로서 선도적인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지난해 전 세계 최우수 지회로 선정됐다고 설명한다. 그는 지난 1998년부터 2005년까지 7년 동안은 미군 장교로서 복역하기도 했다.
한인사회의 허울뿐인 단체가 아니라 꼭 필요한 단체로 우뚝 서고 싶다는 그는 그런 단체로의 성장은 물론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내년 2월 선거에 다시금 나설 계획이다. 회장의 임기는 3년이며 3번 연임할 수 있다.
그는 단맛, 쓴맛, 신맛, 짠맛, 매운맛 등을 경험하고 정신적으로 희로애락의 기준을 설정해 스스로 판단하여 정의를 내리며 행복을 쌓으면서 살려고 한다. 삶은 스스로의 기준과 척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기본인성인 정직과 자기의 삶을 위한 적극성 그리고 삶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은 능력 등을 가훈으로 정하고 있다.
골프를 비롯한 모든 스포츠는 준 프로급이고 바둑은 1급 고수며 잡기(?)에 능한 그에겐 술, 담배를 안 하며 운동을 즐겨하며 절대로 건강에 자만하지 않고 매사에 무리하지 않은 것이 건강비결이다.
아내가 전문직에서 건강하게 은퇴하기를 바라는 그는 아들, 딸 며느리 등도 자기가 몸담고 있는 직업에서 무난하게 생활을 영유하기를 기원하며 개인적으로는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봉사활동을 하면서 골프를 칠 수 있으며 바둑을 단으로 입문하고 싶은 희망을 지니고 있다.
갖고 있자니 큰 부귀가 없고 버리자니 그나마 명예가 아쉽기 때문이라며 재향군인회 수장을 ‘계륵명예’라 표현하는 그는 장교출신으로 보국하는 차원에서 인내심과 추진력을 갖고 향군의 위상정립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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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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