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 75주년 앞두고 ‘기나긴 여정’, 무명용사 묘지에 묻혔던 19세 수병 에드윈 홉킨스
▶ 생면부지 조카·현대과학 도움으로 신원확인 성공, “웰컴 홈, 엉클 에드” 온 마을 추모 속 부모 곁 안장

지난 10월15일 뉴햄프셔 주 킨의 우드랜드 묘지에서 거행된 에드윈 홉킨스의 장례식. 홉킨스는 1941년 12월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서 침몰한 미 해군 전함 오클라호마의 승무원 전사자 429명 중 한명이었다.
지난 10월 중순 뉴햄프셔 주의 아름다운 가을 어느 날, 의사당에 걸렸던 성조기로 감싼 에드윈 체스터 홉킨스(사진)의 관을 실은 장례행렬이 보이스카웃 대원들의 경례를 받으며 마을 광장을 돌아 묘지로 향하고 있었다. 이 작은 동북부 타운 킨의 주민들이 보아 온 어떤 장례식보다 기억에 남을 웅장한 장례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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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명 조문객 중 누구도 19세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숨진 고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글자그대로 무명용사였던 그는 1941년 12월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 중 숨진 2,403명의 전몰장병 중 한명이었다.
그가 승선했던 전함 오클라호마 호는 5개의 어뢰에 맞아 전복 침몰했고 2년 후 선체가 인양되었을 때는 2차 대전 중이어서 뒤엉켜 전사한 429명 승무원의 유해를 분류할 시간도, 의향도, 기술적 방법도 없었다. 전사자들 상당수는 하와이 묘지에 ‘무명용사’로 묻혔다.
이번 홉킨스의 장례식은 가족들과 전쟁포로 지원단체의 수십년 노력과 수사과학의 발전이 만들어낸 성과라 할 수 있다. 다음 주 진주만 공격 75주년을 맞아 기념행사가 준비되고 있는 한편에선 홉킨스처럼 당시 전사자들의 유해가 75년이나 걸린 긴 귀향 여정을 끝내고 고향에 안장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금년에만 오클라호마에 탔던 20여명 전사자 유해의 신원이 확인되어 엄숙한 격식을 갖춘 해군장으로 치러졌으며 일부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일부는 홉킨스처럼 고향에 돌아가 묻혔다.
홉킨스가 1940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해군에 지원한 것은 18세 때였다. 형 프랭크는 이미 6개월 전에 입대했다. 그들의 고향은 지금은 가을 단풍 관광지로 유명한 뉴잉글랜드 지방의 그림엽서처럼 아름다운 마을이지만 경제대공황에서 간신히 벗어났던 1940년대는 젊은이들에겐 취업 기회조차 찾기 힘든 어려운 시절이었다.
야망이 컸던 청년 홉킨스는 입대 지원서에 “무역을 배우고 싶어 해군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시카고와 디트로이트에서 훈련을 받고 상병 계급을 단 그는 1941년 9월9일 고향으로 엽서를 보내왔다. 스마트하고 카리스마도 있었던 홉킨스가 오클라호마 호의 사진엽서에 담아 보낸 안부인사가 그의 마지막 서신이 되었다 :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께. 이것이 내가 탈 배의 사진입니다…우리는 오늘 밤 9시에 출발할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사랑을 보냅니다, 에디가”에디의 형 프랭크에겐 세 자녀가 있었지만 그들은 진주만에서 전사한 삼촌에 대해선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둘 다 과묵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삼촌의 이야기를 꺼내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매년 12월7일이 되면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끄는 게 일이었다고 프랭크의 딸인 페이 홉킨스-부어(70)는 회상한다.
그러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아도 죽음의 그림자는 늘 집안을 맴돌았다. 성인이 된 손녀가 새 자동차를 사도 아직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한 할머니에겐 말하기조차 힘들었을 정도였다. 할머니 앨리스는 진주만 공격 다음해 심령술사를 불러 아들의 혼령과 소통하는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당시 심령술사는 슬픔에 빠진 할머니에게 “누군가가 방에 있다…머리가 온통 젖은 채 서 있다”고 말했었다고 홉킨스-부어는 기억한다.
1987년 93세로 타계한 할머니는 죽기 전 가족 묘비를 주문해 먼저 세상 떠난 자신의 부모와 남편의 이름을 새기게 한 후 맨 아래에 “에드윈 체스터, 1941년 12월7일 진주만에서 전사한 해군 상병”이라고 새겨 넣도록 했다.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이었던 “엉클 에디를 집으로 데려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1943년 인양된 선체에서 물을 뺀 후 시신을 수습하는 작업은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들만큼 끔찍했다. 2년 동안 물속에 잠겨있어 남은 것은 백골뿐이었다. 삽으로 퍼내 두개골은 두개골 끼리 팔 다리 뼈는 팔 다리 뼈끼리 쌓아놓는 것이 고작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뼈들은 ‘무명용사’로 하와이 펀치볼 국립묘지에 매장되었다.
간호사직에서 은퇴한 홉킨스-부어는 정규적으로 하와이를 방문하며 엉클 에디의 유해 발굴에 나섰다. 진주만 생존자로 전우들의 시신 찾기를 하고 있던 레이 에모리를 만났고 전사자 중 일부는 치아기록 등으로 이미 1943년에 신원이 잠정 확인된 상태로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추가 확인 방법이 없어 최종 확인은 되지 못했다는 22명 가운데 놀랍게도 ‘엉클 에디’가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엔 해군당국은 전사자 가족들의 노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청원과 로비 끝에 “전사자들을 지원하는 국방부의 신성한 의무의 한 부분”으로 오클라호마 전사자들의 유해발굴을 허용한다는 국방부의 허가를 받아낸 것은 몇 년이 더 지난 후였다.
유해발굴은 고통스런 작업이었다. 발굴 후 유전자 감식결과 관 하나에 100여명의 서로 다른 사람들의 뼈가 함께 담긴 경우도 발견되었다.
전사 후 75년의 긴 여정 끝에 실현된 홉킨스의 귀향은 흩어졌던 친척들을 불러 모으는 계기가 되었다. 홉킨스의 신원을 최종확인하기 위해서는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샘플 채취가 필요한데 이 유전자는 모계 쪽에만 있는 것이어서 생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버몬트 주에 사는 먼 친척이 달려왔고 그 덕에 홉킨스는 모든 가족들에게 ‘엉클 에드’로 최종 확인될 수 있었다.
장례식에서 마지막 조사를 하며 홉킨스-부어는 말했다 :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가 휘파람불기를 좋아했는지, 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가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던 할머니가 얼마나 기뻐할 지는 상상이 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 한마디입니다…웰컴 홈, 엉클 에드, 웰컴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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