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배넌이 백악관에서 밀려나면서 대중주의자로서 보통 근로자들을 위해 싸우겠다는 도널드 트럼프의 약속은 그의 다른 공약과 마찬가지로 허튼소리로 끝날 것임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의 아젠다는 인종주의를 추가한 역 로빈 후드 정책에 해당한다.
형편이 어려운 가구의 몫을 빼앗아 부유층에 넘겨주는 한편 그보다 소득이 낮은 백인층을 공략해 혼란에 빠뜨리는 공화당의 전형적인 전략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 과정에서 인종카드를 얼마나 노골적으로 사용하느냐 뿐이다.
하지만 언뜻 보기에 공화당 정책의 트럼프 버전은 난항 중이다. 오바마케어 폐기 시도는 2,000여만 명으로부터 의료보험을 빼앗아 소수의 부유한 개인들에게 감세를 제공하는 적하정책(trickle-down policy)의 우스꽝스런 표본이다.
(적하정책은 대기업과 부유층의 부를 먼저 늘려줌으로써 국가경제발전과 국민복지 향상을 꾀하는 정책이다.) 그러나 대중적 반발에 부딪힌 오바마케어 폐기 시도는 의회에서 사망선고를 받은 듯이 보인다.
트럼프 아젠다의 두 번째 사안은 세금 “개혁”으로 이 역시 고전하고 있다. 개혁이라는 단어 앞뒤에 인용부호를 붙인 이유는 세율을 낮추되 이에 따른 세수결손을 세법의 허점을 보완해 보전하는 진정한 의미의 세제개혁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기업과 부유층에 혜택을 주는 대신 적자폭을 확대하는 단도직입적인 감세가 의회를 통과를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지만 그마저 회의적이다.
그렇다면 트럼프의 아젠다는 완전 사망한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적하정책은 근로자들을 겨냥해 공화당이 펼치는 여러 갈래의 공세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회만 주목할게 아니라 연방부처들의 움직임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얘기다.
한발 뒤로 물러나 적하정책을 장기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트럼프의 입법시도 실패는 예외라기보다 기정사실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미국은 감세와 정부축소의 길로 나아갈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잠시 동안 그 길로 나아가긴 했지만 그 같은 변화는 오래가지 못하고 대부분 번복됐다.
의회예산국(CBO)에 따르면 지난 1980년 소득 최상위계층 1%는 전체 수입의 33%를 연방세로 납부했다. 레이건 행정부 시절 이들에게 부과되는 연방세율은 잠시 25%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자료입수 가능한 가장 최근 연도인 2013년 현재 소득 최상위 1%에 속한 납세자들의 연방세는 오바마의 세금인상으로 말미암아 최고 34%를 기록했다.
사회안전망 프로그램의 경우는 어떤가? 일부는 무자비한 칼질을 당했으나 다른 프로그램들은 대폭 확대됐다. 메디케이드의 경우 1980년에는 노년층에 속하지 않은 미국인의 7%를 커버하는데 그쳤지만 오늘날 그 수치는 21%까지 올라갔다.
과세와 지출만 살펴보아도 보수주의적 경제 아젠다가 대부분 실패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부유층의 조세부담이 여전히 높고 사회안전망이 여러 면에서 강화됐지만 레이건 이래 수십년 동안 소득불평등이 크게 심화됐다는 점이다. 근로자임금이 제자리걸음을 한 것과 달리 극소수에 불과한 엘리트층의 수입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탓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인가?
물론 세계화와 첨단기술이 일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글로벌 변화에 노출된 다른 부유한 국가들은 미국과 달리 새로운 도금시대(Guilded Age)로 급속히 진입하지 않았다. (도금시대란 물욕과 부정이 판치는 시기를 일컫는다.)
우리들, 특히 미국의 근로자들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면 행정부의 정책, 그중에서도 언론의 감시망에 잡히지 않는 정책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몇 개월 전 뉴욕타임스에 눈에 띄는 에세이 한편이 실렸다: 한때 트럭기사들의 봉급은 중산층으로 분류되기에 충분한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그들의 실질임금은 1970년대 이후 3분의1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임금삭감이 레이건 시절에 단행됐다.
세계화와 테크널러지는 트럭운수업 일자리를 파괴하지 않았다. 그와 정반대로 트럭 운수업은 현재 일손 부족에 직면한 상태다. 트럭기사들은 부분적으로 이념적 풍토 변화에 따른 교섭권 붕괴로 피해를 입었다.
노동문제를 관장하는 전국노동관계위원회(NLRB)의 분위기만 바뀐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노동문제의 이념적 바탕에 전반적인 변화가 오자 잔뜩 고무된 민간 고용주들은 노조에 적극적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노조가입 기업들의 입지를 약화시킨 규제철폐도 트럭기사들의 임금을 떨어뜨린 부분적 이유다.
이번에는 스펙트럼의 반대쪽 끝을 예로 들어보자: 소득분포 최상위권에 속한 부유층의 폭발적 수입증가에 금융규제 철폐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바로 여기서 우리는 다시 트럼프와 그가 미국의 근로계층에 미칠 영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직까지 조세와 지출 부분에 트럼프가 끼친 영향은 당초 예상만큼 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종종 입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연방기관들에 의해 행정적으로 수행되는 정책들은 상당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반 노동정서가 강한 패스트푸드 회사 경영자를 노동부장관에 임명하려던 트럼프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앤드류 푸저를 노동부장관에 임명하려던 그의 시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다. 행여 아직도 눈치 채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사족을 붙이자면 그를 신뢰하는 사람을 배신하는 것이 트럼프의 주특기다.
<
폴 크루그먼 칼럼>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