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개 인격 가진 실존인물 책으로, 다중인격 대중적으로 알린 고전
▶ [SF, 미래에서 온 이야기] 대니얼 키스의 심리학적 SF

나를 나라고 여기는 정체성은 사람이 세상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출발점이다. 그 정체성의 혼돈과 전도를, 작가 대니얼 키스는 소설과 논픽션으로 깊이 조명했다. 사진은 다중인격을 소재로 한 스릴러 영화‘아이덴티티’(2003) 포스터. <콜럼비아 트라이스타 제공>
1977년 오하이오주립대에서 빌리 밀리건이라는 이름의 한 청년이 강간 및 납치, 강도사건으로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같은 곳에서 세 번이나 범죄를 저질렀고 체포 당시에는 어린애처럼 “내가 뭔가 잘못했다면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했다. 피해자는 범인이 계속 성격이 변하거나 기억을 잃는 것을 목격했다. 재판 당시에는 밀리건에게 10명의 인격이 있다고 알려졌지만, 정밀검사 결과 그에게는 무려 24개의 인격이 있었다.
■최초로 법정에서 인정받은 다중인격
빌리 밀리건은 법정에서 다중인격으로 무죄를 선고받은 최초의 사람이다. 밀리건은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며 다중인격 논쟁에 불을 지폈다.
바로 전 해에 드라마로 제작된 16개의 인격이 있는 시빌이라는 여성의 사례도 화제를 낳고 있었지만, 시빌은 밀리건처럼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고, 지금도 그 신빙성에 의문이 있는 편이다.
다중인격의 진단 자체는 오래되었지만 증상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근원적으로는 진단이 어렵기 때문이다. 성격 변화는 보통의 인간에게도 흔히 일어나고, 정말 인격이 여럿인지, 아니면 사기꾼이 탁월한 연기를 하는 것인지 혹은 기억상실이나 혼란증세인지 판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많은 문화권에서 ‘빙의’나 ‘귀신들림’으로 해석하여 진단 자체가 되지 않기도 한다. 다중인격이 무죄사유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여전히 해석이 분분하다.
하지만 밀리건은 다중인격에 가장 회의적인 의사조차도 증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중퇴 학력의 밀리건에게 무려 24명분의 지식과 능력이 있었고, 이는 연기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의학도가 있는가 하면 가라데 고수, 탈출 전문가도 있었다. 각 인격마다 성별, 나이, 성격, 구사할 수 있는 언어, 지식, 지능, 말투, 체력수준까지도 달랐다.
본 인격인 빌리 밀리건은 열여섯 살에 자살시도를 한 시점에서 한 번도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깨어나면 자살을 시도하리라 생각한 다른 인격들은 ‘형제자매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그를 깨우지 않고 있었다.
■다중인격자의 존재를 알리다
이미 인간의 뇌와 정신장애에 대한 심도 깊은 소설 ‘앨저넌에게 꽃을’을 쓴 바 있는 작가 대니얼 키스가 빌리 밀리건에게 관심을 두었다. 그는 2년간 그의 옆에서 지내며 논픽션을 쓰기 시작했다.
밀리건은 지속적으로 시간을 잃어버리고 살았기 때문에 그의 인생을 조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키스는 밀리건을 수백 번 만나 대화하는 것은 물론, 주변인물 62명을 인터뷰했고, 대금지불서, 영수증, 보험증서, 치료기록과 문서를 이용해 사건을 배열했다.
그럼에도 밀리건이 대화 도중 계속 기억을 잃는 바람에 거의 포기할 뻔했다가, 인터뷰 도중 전 인격이 융합된 새로운 인격이 나타나주는 바람에 겨우 집필을 완성할 수 있었다.
24명의 인격을 그려낸다는 전대미문의 과제가 걱정되었던 키스는 우선 다섯 개의 인격을 가진 다중인격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인 ‘다섯 번째의 샐리(1980)’를 집필했다. 같은 해에 다중인격은 비로소 미 정신의학회 정신질환 진단 기준인 DSM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다음해에 키스는 논픽션 ‘빌리 밀리건(1981)’을 출간했다. 키스는 24명의 인격이 가족처럼 한 몸을 공유하며 사는 이야기를, 정확하고 섬세한 자료조사와 탁월한 심리학적 분석, 소설적인 재미까지 완벽한 작품으로 그려내는데 성공했다.
‘아동학대의 희생자들에게 바친다’는 서문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흥미본위에 머무르지 않고, 다중인격이 생겨나는 불행한 배경과 그 이해와 치료법에 집중한다. 이 논픽션은 세계에 다중인격을 대중화시키며 현대 심리학의 고전이 되었다.
DSM에 증상이 등재되고, 다른 다중인격자인 시빌의 책과 드라마도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 내에서 75건에 불과했던 다중인격 진단 환자 수는 4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후 과잉진단을 줄이고 지침이 명확해진 뒤에야 다시 환자 수는 정상 수준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도 증상 자체를 의심하는 의견은 있는 편이지만, 현재는 양전자단층촬영(PET), 자기공명영상(MRI) 등의 발달로, 인격이 변할 때 뇌파 패턴과 생리학적인 현상마저 달라진다는 점이 확인되어 다중인격의 증거가 되고 있다.
■바보와 천재가 보는 세상과 나
‘앨저넌에게 꽃을(1966)’은 대니얼 키스의 대표작이자 영미문학의 고전이다. 이 작품에서 키스는 정신지체인 사람이 뇌수술로 천재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려냈다. 키스는 작가가 되고자 했지만 의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와 충돌하면서 ‘교육을 통하지 않고 인공적으로 지능을 늘릴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하는 문제를 계속 고민했다고 한다.
키스가 기본적인 읽고 쓰기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위해 특수 영어반 수업을 하던 중 소설의 아이디어는 더욱 구체화되었다. 한 학생이 그에게 “열심히 해서 똑똑해지면 나도 이 일반 수업을 받을 수 있나요? 난 똑똑해지고 싶어요”하고 애원했다. 다른 반의 한 학생은 특수반에서 눈에 띄게 진전을 보였지만, 일반 학교로 돌아가자마자 배운 것을 전부 잃고 말았다.
소설은 뇌실험에 응한 찰리의 1인칭 시점의 경과보고서로 진행된다. 찰리는 IQ 70에서 보통의 인간으로, 다시 IQ 185의 천재에 이르렀다가 다시 천천히 퇴화하여 본래대로 돌아간다. 소설의 서술은 어린애의 오타투성이 문장에서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는 전문가의 언어로 한 단계씩 변해간다.
지능이 변하면서 찰리가 보는 세상의 풍경도 변하고, 과거의 체험도 모두 다르게 해석되며, 가족과 주변사람들의 태도도 모두 변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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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영 SF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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