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헌법재판소가 12.3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에서 파면 결정을 내리면서, 6월 3일 조기 대선이 치러졌다. 그리고 결국 야당 후보 이재명이 새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 전례 없는 비극이 또 하나 더해졌다. 보수를 대표해 온 대통령 다섯 명 모두가 재임 중이거나 임기 후에 형사 처벌을 받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뒤 내란죄로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기업 뇌물수수와 횡령 혐의로 징역 17년형을 받았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정농단으로 헌정사상 첫 탄핵을 거쳐 징역 22년형이 선고됐다. 그리고 권력 사유화와 검찰권 남용으로 지탄받은 윤석열 전 대통령은 현재 내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이처럼 보수 진영의 몰락과 자멸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미 20여 년 전부터 경고음은 울리고 있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당시 한나라당이 위기에 몰렸을 때, 원내대표 경선에 나선 후보들은 저마다 쇄신을 외치며 상징적인 고사성어를 내세웠다. 김덕룡 후보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주장했다. 옛 제도를 근거로 삼되,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자는 뜻이었다. 김문수 후보는 ‘거고취신(去故取新)’을 내걸었다. 낡고 부패한 관습을 과감히 버리고 새것을 받아들이자는 의미였다. 안상수 후보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강조하며 과거의 교훈을 되새겨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혁신의 강도로 따지면 ‘거고취신-법고창신-온고지신’ 순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 넘는 세월 동안, 보수는 혁신에 실패했다. 현실에 안주한 기득권 세력으로 남았고, 국민의 눈에는 부패와 독선의 대명사로 각인됐다. 대통령이 바뀌어도 권력 사유화, 검찰권 남용, 국민과의 단절이 반복됐다. 그 결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연이어 터졌다.
보수를 대표하는 다섯 명의 대통령이 연이어 법적 심판을 받게 된 이 역사는, 단순히 한 진영의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의 품격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참혹한 대가를 국민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현실이다. 보수의 자멸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피해로 이어졌고, 야당의 승리로 새 질서가 시작되었으나 그것이 또 다른 독선과 오만으로 변질될지 모른다.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점이 있다. 보수와 극우는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이다. 보수는 국가와 제도의 지속성을 중시하면서도 시대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현실주의다. 반면 극우는 증오와 갈라치기를 부추기고, 민주주의 규범을 부정하며 권위주의적 질서를 강요한다. 보수가 자기반성과 혁신을 통해 정치적 중심을 지키려 한다면, 극우는 사회 불안을 이용해 극단으로 치닫는다. 보수가 실패하고 권력의 공백이 생기면, 그 틈새를 극우가 파고들어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한다.
지금은 20년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 후보들이 외쳤던 고사성어만으로는 부족하다. 과거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새로운 길을 찾는 ‘온고지신’, 옛것을 바탕으로 새것을 창조하는 ‘법고창신’, 낡은 관습을 과감히 버리고 새 가치를 취하는 ‘거고취신’을 넘어야 한다. 뼈대를 바꾸고 껍질까지 갈아엎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거듭나겠다는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각오가 지금의 보수에 요구된다. 만약 이번에도 진정한 혁신 대신 기득권 유지에만 매달린다면, 또다시 파국과 단죄의 역사가 반복될 것이다. 그 대가는 언제나 국민의 몫이다.
정치는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혁신의 과정이다. 실패의 역사를 외면하는 권력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 보수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교훈은 분명하다. 역사를 잊은 자는 반복해 심판받는다는 냉혹한 진실이다. 그리고 보수가 본래 지녀야 할 절제와 책임,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한국 사회에 남는 것은 ‘극우의 광기’라는 또 다른 위협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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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세희 부국장대우ㆍ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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