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8월말쯤이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공연스케줄을 훑어보다가 그가 드디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s)의 도전을 시작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첫 해외연주가 2024년 11월3일 뉴욕주 로체스터의 이스트만 씨어터였고, 이어 프린스턴, 샌프란시스코, 밴쿠버, 파리에 이어 올해 4월말 카네기홀과 케네디센터 연주가 예정돼있었다.
그 일정표를 본 순간 곧바로 이스트만 씨어터의 사이트로 들어가 티켓 3장을 구입했다. 임윤찬의 골드베르크를 처음으로 들을 수만 있다면 동부까지 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려는 각오였다. 그만큼 임윤찬도 좋아하고 골드베르크 변주곡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연을 한달 여 앞두고 비행기표와 현지사정을 알아보던 중 포기하고 말았다. 일단 뉴욕주 최북단의 로체스터로 가는 넌스톱이 없었고 비행시간만 9시간 걸린다고 나왔다. 게다가 주변에 괜찮은 뮤지엄이나 가볼만한 관광지도 없었으니, 거기까지 가서 공연만 보고 온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낭비가 큰 여행이었다. 함께 가기로 한 사람들이 하나둘 빠지면서 없던 일이 되었고, 버릴 뻔했던 티켓은 다행히 리세일 사이트(StubHub)에서 판매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년을 기다렸다. 지난 16일, 임윤찬이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무대로 걸어 나오는 순간, 오랜 기대와 벅찬 감격이 뒤범벅되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가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첫 아리아를 누르던 순간과 30번의 변주를 마치고 마침내 다카포아리아로 그 고독한 여정을 완성하던 순간, 또 아름다운 앙코르, 바흐의 ‘아리오소’를 선사하던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처음에 임윤찬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겠다고 나섰을 때는 사실 좀 이르다는 생각이 있었다. 대가의 경지에 오른 피아니스트들이 필생의 작업으로 여기는 작품에 스무살 애송이가 도전장을 내다니. 그런데 골드베르크를 세상에 알린 전설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이 곡을 처음 녹음하여 불세출의 명반을 남긴 것이 22세 때였음을 떠올리자, 천재 피아니스트에게 이보다 더 적절한 시기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임윤찬은 “제 마음속에 있는 음악의 빅뱅”이라며 이 곡을 아주 오랫동안 갈구하고 탐구해왔다. 어린 시절 그가 처음 구입한 음반박스에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뭐가 잘 안 풀릴 때마다 이 곡을 연주하며 해소했다고 하니, 아마 셀 수 없이 많은 시간 동안 연구하고 분석하고 연습했을 것이다.
2022 밴 클라이번 콩쿠르 인터뷰에서 “콩쿠르 결과와 상관없이 이제 선생님(손민수)에게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배울 수 있게 돼서 너무 기쁘다”고 했고, 우승 후 ‘어떤 오케스트라와 연주하고 싶으냐’는 질문에도 “오케스트라는 어떤 곳에서 제의가 와도 감사하다. 다만 독주회는 꼭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 염원을 이루고 있는 중이다. 앞서 언급한 도시들 외에도 서울, 통영, 라호야, 빈, 런던, 도쿄, 베르비에, LA, 시카고, 보스턴까지 1년 동안 약 20곳에서 골드베르크 리사이틀을 열고 있다.
놀라운 것은 가는 곳마다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그가 골드베르크 연주의 ‘틀’을 깼기 때문으로 보인다. 글렌 굴드의 음반 이후, 그 기계처럼 건조하고 명료한 음색과 속사포 같은 속도, 감상이 배제된 바로크적 연주는 일종의 디폴트가 되었고, 지금까지 나온 200여종의 골드베르크 음반은 대부분 이 원전주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바로 작년 4월 디즈니홀에서 연주한 비킹구르 올라프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임윤찬은 달랐다. 수학적이고 건축적인 바흐음악에 거친 숨과 생기를 불어넣었고, 페달을 마음껏 사용하며 낭만적이고 현대적인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창조해냈다. 사실 바흐는 악보에 아무런 지시사항을 남기지 않았기에 현대의 연주자는 시대악기 하프시코드의 제한에서 벗어나 피아노의 다채로운 표정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임윤찬은 한 옥타브를 올리거나 내려서 치기도 하고, 도돌이표 반복구에서는 꾸밈음(트릴)을 더했으며, 리듬과 템포와 강약에서 자유로운 변화를 시도하며 각 변주에 유희적 해방감과 시적 섬세함을 덧입혔다. 그리고 그 모든 변주는 즉흥적인 것 같지만 엄청난 통제력으로 완벽하게 계획된 것이었고, 수많은 연구와 연습과 정성으로 다듬어 만든 연주임이 느껴졌다.
임윤찬의 골드베르크를 듣고 나서야 오랜 로망이던 글렌 굴드를 비로소 극복한 느낌이다. 굴드의 연주가 평면적이라면 윤찬은 입체적이고, 굴드의 것이 흑백 고전영화라면 윤찬의 연주는 현대의 컬러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굴드는 재녹음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죽기 1년전인 49세 때 다시 한번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했다. 연주시간 38분의 초스피드로 재기발랄함을 뽐낸 첫 음반과 달리 그는 마지막 음반에서 51분 동안 고독과 관조와 내적 성찰이 반영된 연주를 들려준다. 보통 75~80분 걸리는 골드베르크를 굴드가 그처럼 빨리 친 이유는 악보마다 붙어있는 도돌이표를 대부분 무시하고 쳤기 때문이다. 임윤찬도 세월이 많이 흐른 후 다시 친다면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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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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