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장했던 무역센터가 잿더미로 쓰러져 내리고 통곡하는 희생자들의 가족들을 보면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다. 그 비통함과 분노에 동참하기 위해 헌혈을 하려고 한인타운내 적십자사를 찾았다.
나의 나이 43세. 굳이 헌혈을 택한 이유는 주사 바늘이 혈관을 뚫고 들어갈 때의 아픔을 느끼면서 죽어간 시민들에게 애도를 표하고 나의 피로 한생명이 구해진다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듯 싶었다.
한인타운 버몬트와 11가에 위치한 적십자사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 45분. 봉사자들의 안내를 받고 다른 헌혈자와 섞여 3시간이 지난 오후 4시 47분에 끝났다. 실제로 피를 빼는 시간은 5분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나머지 시간은 서류작성과 간단한 테스트와 기다림이었다. 그 3시간동안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우선 헌혈자들. 내 눈에 들어오는 헌혈자 대부분은 히스패닉계였다. 간간이 한국사람이 보였다. 한인봉사자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한인타운의 샤핑몰에 아름답게 화장하고 활기차게 다니던 그많은 여성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타운의 골프연습장과 당구장에 넘쳐나는 건장한 스포츠 매니아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셀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카페, PC방과 술집 등지에서 젊음을 불태우던 젊은 남녀들은 모두 어디에 갔는지? 한국에서 정치가가 오면 한복으로 곱게 단장하고 열정적으로 봉사하던 사모님들은 어디에 있을까? 그나마 간간히 눈에 띄는 한인 헌혈자는 꾸미지 않은 동네 아줌마, 중년의 아저씨 그리고 몇명 학생뿐이었다. 정말 가슴이 쓰라렸다.
히스패닉 헌혈자는 다양했다. 모든 연령층의 남녀가 참가하고 있었다. 현혈자들의 차림은 넉넉하지도 않아 보였고 많이 배운 지식인들 같지도 않았다. 나의 옆자리에는 60세가 넘어보이는 멕시코계통의 할머니가 있었다. 3시간이나 기다리면서도 질서가 있었고 조급함이나 불평도 없었다. 모두가 뿌듯한 자부심이 얼굴에 나타났다.
한인타운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이곳 한인타운은 수만명이 거주하고 일하고 있는 명실공히 한인들의 중심인 곳이다. 그러한 이곳에 진정 나라가 어려움에 빠져있고 주민들의 도움을 절실히 바라고있는 이때에 동참하는 한인은 극소수에 불가하였다. 적십자사의 스텝이 한국어 통역을 부탁해왔다. 허나 나는 영어가 능숙치 못하여 도와줄수가 없었다. 헌혈을 하려면 영문으로 된 서류를 작성하여야 하는데 한인 헌혈자들의 통역을 도와줄 봉사자가 한명도 없었다.
이번 참사는 한인의 이미지를 고취시킬 절호의 기회이다.
참사는 뉴욕에서 일어났지만 전국 모든 한인타운에서 열화같은 봉사의 불꽃이 일어나야한다. 나의 피 한봉지가 꺼져가는 한생명을 구할수 있는 이 좋은 일을 남에게 빼앗겨야 하는가 말이다. 국가가 위급할 때 구하는자는 한국계 이민자들이요, 남이 도움을 필요로 할때 몸을 바쳐 제일 먼저 도와주는 민족은 한인이다 라는 평가는 언제나 얻을수가 있겠는가.
LA폭동으로 “우리는 피해자다”라고 동정을 얻기 위해 끝없이 행렬하는 한인들 보다는 남을 도와주기위해 봉사자 한인들이 끝없이 행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자녀들의 손을 잡고 헌혈에 참여하자. 사랑하는 자녀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킬수가 있다. 남이 고통받을때 함께 할줄할고, 국가가 어려울때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제 참여할 줄 알며, 타인을 도울 줄 아는 인간으로 가르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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