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처럼 고향에 대한 애착이 강한 민족도 드물 것이다. 멤피스에 살고 있어도 하나같이 "나는 한국인"이고, 서울에 몇십 년을 살아도 여전히 "나는 경상도 사람"이고 "나는 전라도 사람"이다.
정초나 추석 때마다 천 오백만명이 고향을 찾는 민족 대이동이 벌어진다. 그리고 대중 가요의 상당 부분이 고향 노래인 것도 고향에 대한 향수(鄕愁) 때문이다. 이렇듯 한국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일생 동안 ‘부적’ 처럼 달고 다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기 우리의 경우 추석 송금을 하고, 추석 전화를 거는 고향 방문은 있어도 고향에 흐르고 있는 "우리의 것, 우리의 멋"은 철저하리 만치 외면하는 동포가 있다. 그래서 오죽하면 이웃 중국 사람 입에서 ‘전통 없는 당신들 이거 안돼 해 …"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전통 없는 휴지통에서 장미꽃은 못 핀다’는 얘기다.
타향에 살면서 "우리의 것"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남의 것"만을 맹종하는 것이나, 타향에 살면서 "우리의 것"만 내세우고 "남의 것"을 깡그리 외면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나를 낳아준 고향애도 소중하지만, 나를 키워준 또는 나를 키워주고 있는 타향애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친모와 함께 유모도 어머니요 사랑인 때문이다. 그래서 하는 얘기는 "고향이 따로 있나 정들면 고향이지"이다.
대지(大地·The Good Earth -1931-)의 노벨 작가 ‘퍼얼 벅’(Pearl Buck ·1892-1973)여사가 한국에 와 경주지방을 여행했을 때 지게에 짐을 진 농부가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농촌 풍경을 보고 이제 더 이상 한국에서 무엇인가를 보지 않아도 흡족하다고 했다. 단순한 농촌 풍경이 아니고 달구지에 실은 나락 단을 농부가 나누어 짐으로서 달구지 끄는 짐승을 배려한 모습이 이 작가를 감동시킨 것이다. 그리고 퍼얼 벅은 “내 고향 웨스트 버지니아에 온 것 같다"(This town like my home town.)고 되풀이했다. 마음에 들면 고향이지 고향이 따로 없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이민 1세들이 자식들 키워 놓고 하는 말은 무엇일까. 각자 다르겠지만 누군가는 말 대신 다음 노래를 하겠다며 끝내 끝을 맺지 못했다. 「타향살이 몇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년에 청춘만 늙어 ……」
실제 만주 용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1933년 조선일보사가 OK레코드와 제휴하여 애향가의 가사를 공모했었다. 말이 애향가지 실은 또다른 애국가를 통해 나라 사랑을 굳히기 위해서다. 이 현상 모집에 당선된 가사가 김능인의 ‘타향살이’(원제목은 타향)이고 이것을 손목인이 작곡, 고복수가 불러 불과 한달 만에 5만장의 유성기판이 팔렸다. 그 여세를 몰아 그들은 우리 실향민이 많이 사는 만주 두만강 근처 용정으로 달려가 공연을 했다.
’타향살이’ 2절「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에서 청중속에 흐느끼는 소리가 나더니 「고향 앞에 버드나무…」에 이르러서는 모든 청중이 목놓아 울었고, 「가도 그만 와도 그만…」이란 대목에서는 고복수 자신도 울어 끝을 못 맺고 말았다.
공연 후 30대의 한 부인이 무대 뒤로 찾아와 쪽지 하나를 주며 고향에 소식 전해 달라는 말을 남겨 놓고 그 길로 두만강 지류에 투신 자살한 애화도 있었다. 이렇게 향수 자살 마저 생긴 ‘타향살이’였다.
그 후 작곡가 손목인은 ‘목포의 눈물’을 이난영에게 불리는 등 60여년의 오랜 작품활동을 통해 1천여 곡의 주옥같은 노래를 발표했다. 오늘날 손목인 선생은 몰라도 ‘타향살이’ 와 ‘목포의 눈물’을 모른다면 일단 국적을 의심해볼만 하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 노래들이 단순한 유행가가 아니고 국민가요로 일제치하에서 애국가처럼 불러졌기 때문이다.
손목인, 그는 예명 그대로 목인(牧人)으로 목가적(牧歌的)인 타향살이를 즐겼다. 1999년, 향년 86세로 세상을 하직한 곳도 공교롭게 타향이었다. 분명한 것은 그는 우리시대의 한 명사(名士)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와 우리 사회는 이 분야만이 아니고 많은 분야에서 외길을 걸어온 명사들을 예우하는 일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몇 년 전 프랑스의 한 샹송가수가 죽었을 때 그리고 미국 원로 가수의 80세 생일 잔치 때 국가원수를 비롯한 사회 지도층이 구름처럼 모여들던 장면이 새삼 부럽기만 하다.
98년 말 한미친선음악회란 이름으로 열린 음악회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였다. 때 마침 내한 중인 크린턴 미국대통령이 평범한 옷차림으로 무대 뒤에 서 있다가 사회자(조영남)의 안내로 무대 중앙에 나온 일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이 해프닝에 관중들은 일제히 기립 박수를 보내며 열광했다. 그때 우리 국가 원수도 함께 무대에 나와 가수, 악사와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보통사람으로서의 자세를 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마 박수 소리는 더 요란했을 것이다. 동고동락(同苦同樂),「국민과 함께 울고 웃는 정부」는 정말 요원한 것인가.
맴피스 한인사 편찬위원장
/ikhchang@aol.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