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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영 <서울경제 뉴욕특파원>
어쩌면 지금 한반도와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이 5년 전과 비슷한지 모르겠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다음날인 97년 12월19일 백악관 지하 상황실에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 등이 참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57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지원키로 약속했음에도, 한국 경제는 회생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원화 환율은 1달러당 2,000원까지 폭락하고, 외국 채권은행들은 한국에 빌려준 돈을 마구잡이로 빼내갔다. 당시 백악관 지하벙커에서의 주제는 한국의 외환위기였다.
주무부서인 재무부의 루빈 장관은 한국 정부가 요구한 지원을 반대했지만, 국무부와 국방부는 한국의 경제불안을 장기적으로 방치하면 북한의 도발을 부를 가능성이 있다며 지원을 요구했다. 재무부는 마침내 국무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국을 지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고,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이 이에 서명했다.
며칠후 클린턴 행정부는 데이비드 립튼 재무부 차관을 한국에 보내 김대중 당선자를 만나 경제 개혁 약속을 받아내고 돌아왔다. 그 다음날인 12월24일 워싱턴의 미 재무부는 뉴욕 은행들에게 한국에 빌려준 차관의 만기를 연장하라고 지시(?), 한국 경제가 파산직전에서 살아났다.
작금의 상황을 보자. 대통령 선거 과정과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직후에 터져 나온 것이 북한 핵개발 이슈다. 주무부서인 국무부의 도널드 럼스펠드 장관은 이라크와 북한과의 두 전쟁을 동시에 치를 수 있다며 한반도에서 전쟁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
그러나 며칠후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텍사스 농장에 휴가중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북한 핵문제를 무력이 아닌 외교 채널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설득했다. 이에 부시 대통령과 그의 참모진들이 동의했다. 부시 정부는 이달중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를 특사 자격으로 한국에 김대중 정부와 노 당선자 측과 북한 핵 이슈에 대해 한미간 정책 조율을 할 예정이다.
이슈가 경제 위기에서 핵 위기로, 한국의 문제에서 한반도의 문제로 바뀌었을뿐 어쩌면 5년전의 상황이 되풀이되는 듯 싶다.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 저널 등 미국 유력 신문에서 며칠째 1면 머릿기사와 사설, 논평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뉴스로 채워지고 있는 것도 5년전과 같다. 당시엔 한국의 외환위기가 주제였고, 미국 언론들은 ‘악당(villain)’등의 험악한 용어를 사용하며, 한국의 기업과 금융인을 정경유착과 경제 파탄의 원흉으로 지목했다.
지금 미국 언론들은 한국에 대해 믿을 수 없는 우방쯤으로 냉소를 보내며, 북한에 대해 ‘악의 축(axis of evil)’등의 용어로 공격하고 있다.
외환위기에 휩싸여 있던 5년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현상적으로 비슷한 점들이 많다. 우선 대통령 선거를 전후로 이슈가 터져 한미 간에 쟁점으로 부각됐고, 한국 경제가 둔화되고 있었다.
물론 두 시점 사이의 한국 경제와 주변 국제정세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당시 한국 경제는 구조적인 문제가 표출되면서 붕괴직전에 있었지만, 오늘날은 경제의 기초여건이 비교적 단단하다. 결정적인 차이점은 지난번에는 동아시아의 경제위기였지만, 지금은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또 5년 사이에 한국인들의 문화와 정서가 달라졌다는 것도 큰 변화다. 따라서 5년전의 상황을 돌이켜보며 해법을 찾기엔 새로운 변수들이 많다.
연말연시를 보내면서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은 상당히 낮아진 것같다. 하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미국이 한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외교 채널을 통한 대화로 문제를 풀겠다고 한발 물러섰지만, 북한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북한이 정말 핵을 보유하려는 것인지, 벼랑끝에서 협상 테이블로 나올 것인지도 아직 미지수다.
5년전 한국 경제가 파산 직전에서 회생한 것처럼 이번 북한 핵 이슈도 벼랑 끝에서 선회,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같다. 벼랑끝 전술의 위험성은 자칫 잘못하다간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민족의 생존권을 놓고 벼랑에서 맞서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inkim@korea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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