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 한국서 언론개혁 바람이 불어 신문사 발행인들이 줄줄이 교도소에 들어간 적이 있다. 그때 언론계가 궁금해 했던 것은 “무엇이 DJ로 하여금 그렇게 화가 나게 했느냐”였다. 이에 대한 언론인들의 대부분 대답은 “그놈의 노벨평화상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이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 것을 너무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일부 언론은 칭찬하기는 커녕 “지금이 때가 어느 때인데 노벨상 받으러 대통령이 스웨덴으로 가느냐”고 비꼬았다. 여기에 DJ가 격분한 모양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측근들도 DJ 재임기간 중 가장 언론에 대해 섭섭했던 일이 ‘노벨상 사건’이라는 데에는 이의를 달지 않는다. 노벨평화상은 DJ의 자존심이요 긍지였다.
그런데 지난 2월 5일자 월스트릿 저널은 DJ는 노벨상 받을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것도 기사가 아닌 사설에서 이렇게 비판했으니 김대중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보통 아픈 것이 아니다. 거의 모욕에 가까운 일이다. 임기를 마치고 걸어나가는 사람에게 뒤에서 찬물을 끼얹은 것이나 다름 아니다.
월스트릿 저널은 “북한이 돈을 받기위해 정상회담에 참가했기 때문에 이 상(노벨상)은 전적으로 받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권위는 의심받는 순간부터 권위가 아니다. 그것이 대통령이건, 사장이건, 아버지이건 마찬가지다. 김대통령이 남북관계의 이중성과 북의 폐쇄성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결국 ‘현대’와 합작으로 북한 김정일에게 돈 갖다 바치고 만난 꼴 밖에 안된 셈이다.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인데 대통령 자신은 이 일로 노벨상을 탔으므로 국민의 입장에서는 배반감을 느끼는 것이다.
권력자가 빠지는 일반적인 함정은 자기가 법 위에 존재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실이다. DJ도 이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 한다”는 금언도 이래서 생겨난 말이다. 결과적으로 DJ는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에 더 망신스럽게 된 셈이다. 보약이 독약이 된 것이다.
더구나 그는 IMF 사태로 국가가 어려울 때 대통령으로 당선돼 ‘고통분배’를 취임일성으로 내걸었었는데 이제와서 돌아보면 측근부패도 그렇고 노벨상 문제도 그렇고 정권잡은 사람들이 노른자위만 챙겼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지도자의 최대 비극은 국민들로부터 경멸 당하는 것이다. 자신에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해야 참다운 지도자인데 DJ는 자신에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했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됐다. 특히 개혁수술을 당했던 언론의 입장에서는 DJ의 가치기준 잣대가 이중적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며칠 있으면 퇴임한다. 그런데 한국 정치무대에서 퇴장하는 대통령의 뒷모습들이 하나같이 비참하다. 취임할 때의 모습과 퇴임할 때의 모습이 그렇게 차이가 날 수가 없다. 마치 라스베가스 공항에 도착하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들의 표정이 다른 것이나 비슷하다. 활기차게 들어 왔다가 어깨가 축 쳐져 떠나는 모습은 권력이 마약이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
DJ의 최대 꿈은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 야당투사,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등 그의 인생은 한국 근대 정치사에서 최대 행운아처럼 보였다. 그러나 노벨상 탔으면 뭐하나. 아들이 아직도 감옥에 갇혀 있고 미국에서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신문 사설이 노벨상 탈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고, 국민 앞에 나와 사과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니 과연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DJ의 행운인지 불운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됐다.
3김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다. 한 시대를 수놓았던 3김의 마지막 모습이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중에서도 YS, DJ 두 김에 걸었던 국민적 기대는 완전히 실망으로 바뀌었다. 두 사람 모두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기를 원했지만 현직 대통령이 아들을 구속해야 하는 비운의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퇴장할 때 박수받는 대통령이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다.
이철 주 필
chul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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