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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영 <서울경제 뉴욕특파원 >
대통령이 야당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준 혐의가 있는 최대 석유회사를 조사하라고 검찰에 지시했다. 그 회사 회장이 전격 구속되고,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총선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야당의 공격은 물론 집권 여당 내의 분열이 가속화되고, 대통령의 신뢰도가 위험받고 있다.
어느 나라의 이야기일까. 바로 지금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얘기다. 러시아 검찰은 야당에게 정치자금을 준 혐의로 최대 석유회사인 유코스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회장을 전격 구속했고, 그가 구속되자 주가가 폭락하고, 해외투자자들이 러시아를 떠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검찰이 알아서 한 일이지, 시킨 적이 없다고 잡아뗐지만, 집권당 내에서도 푸틴 대통령의 조치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오는 12월 총선을 앞두고 러시아의 정치 싸움이 경제 위기로 비화되고 있는 것이다.미국 언론들은 연일 유코스 사태를 자본주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존 맥케인 상원의원은 러시아는 밖으로는 신 제국주의, 안으로는 독재로 돌아가고 있다고 독설을 퍼부었고, 헤지펀드의 대부 조지 소로스는 러시아가 국가 자본주의로 진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코스 사건은 한국의 정치자금 사건과 상당히 비슷하게 전개되는 것 같아 보인다. 최대 정유회사인 SK의 손길승 회장이 거액의 정치자금을 준 혐의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그러나 한국에선 러시아와 달리 기업 정치자금 사건이 금융시장에 거의 충격을 주지 않고 있다. 오히려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발표 후 주가가 큰 폭으로 올라 정
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던 사람들을 머쓱하게 했다.
러시아와 한국이 다른 이유는 여러가지 들 수 있다.
첫째, 러시아에는 국제 석유카르텔이 개입하고,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사태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호도르코프스키 회장은 부시 정부 핵심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코스는 사업 확장을 위해 지분 40%를 매각키로 하자, 미국의 석유 메이저인 엑슨-모빌, 셰브론텍사코와 영국의 BP등이 달려들어 지분 매입 또는 원유 도입 계약을 맺었다.
석유메이저들은 앞으로 중동 석유가 고갈될 경우에 대비, 미래의 안정적 공급원 확보를 위해 러시아 회사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계약이 이행되지 않을 경우 언제라도 자본을 빼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자본주의 역사가 일천한 러시아 기업들이 회계를 깨끗이 관리하거나, 정치자금 거래 관행을 청산한 것은 아니지만, 석유메이저들은 호도르코프스키 회장의 구속을 계기로 러시아 시장을 흔든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 시장에는 어떠한 형태의 국제 카르텔이 개입할 이해관계가 없고, 정치자금 사건이 확대되더라도 시장 경제의 기본틀인 계약이 왜곡되지 않을 것이라는 컨센서스가 형성돼 있다. 정치자금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는 기업들은 오랫동안 해외투자자들이 투명 경영에 이의를 제기해온 회사들이다. 검찰 수사로 정치권과 기업 간의 검은 돈 거래가 청산된다
면 코리안 디스카운트 요인이 사라지는 계기가 된다는 게 외국투자가들의 시각이다.
둘째, 러시아에선 특정 기업과 특정 정당을 겨냥해 집권세력이 권력의 칼을 휘두른데 비해 한국에선 여당이건, 야당이건 공정하게 수사하겠다는 검찰의 의지가 시장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에 투자한 해외자본가들은 유코스 회장 구속후 푸틴 정부가 어느 기업에 칼을 댈지를 모르겠고, 정권과의 유착관계가 투자의 요소가 되는 자본주의화에 불안해
하고 있다. 푸틴에게 정치자금을 준 기업인도 잡아들였다면 시장이 그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검찰의 대선 자금 수사가 다수의 재벌 기업으로 확대되고, 정치권의 빅뱅으로 이어지고, 러시아처럼 시장 동요를 초래할 소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한국이 러시아처럼 되지 않는 방법은 검찰의 조사가 공정해야 하고, 이를 계기로 기업이 정치권에 검은 돈을 거래하는 관례를 청산, 경영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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