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 말’만 빼고 할말을 다 했다. 그 말만 빼놓은 그의 뜻을 능히 알면서도 객석에서 그 말을 캐묻는 질문이 나왔다. 익히 들어온 질문이고, 따라서 에둘러가는 이력 또한 붙을대로 붙은지라 그는 물을 들이키고 땀을 닦아가며 노련하게 다른 말로 그 말을 덮어씌웠다.
한국의 각종 여론조사에서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로 꼽히는 고건 전 국무총리(사진)가 1일 저녁 스탠포드대에서 ‘대권선언 없는 대권행보’를 계속했다. 최근 서울 연세대에서 행한 강연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연세대에서 그랬듯이 스탠포드대에서도 그는 2007대선 출마여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말을 아끼면서 한국사회에 대한 진단과 처방 등 대권을 염두에 둔 듯한 발언들을 술술 풀어놓았다.
스탠포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소장 신기욱 교수)의 아시안지도자포럼 제2차 공개특강 형식으로 엔시나홀에서 이뤄진 이날 강연(제목 “이념을 넘어 통합의 향해”)에서 고건 전 총리는 평생동안 공직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특히 대한민국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정국에서 지난해 3월부터 2개월동안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으면서, 몸소 체득한 리더십의 요체를 “미래에 대한 확실하고 열린 비전으로 사회구성원들의 꿈과 역량을 한데 묶어 시대가 요구하는 과업을 함께 이뤄내는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바로 이 점에서 나는 한국의 정치지도층이 이같은 적절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완곡하되 뼈있는 여야정치권 비판을 잊지 않았다.
그는 이어 뉴밀레니엄의 희망에 들뜨고 2002년 월드컵 승리에 고무됐던 한국에서 불과 3년만에 노사간 도농간 빈부간 충돌이 확대되는 등 불확실성이 지배하고 있으며, 집권측이 민주화와 진보세력의 기수를 자처하고 자유보다 평등을 우선시하면서 보수적 야권과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고 진단한 뒤, 진보냐 보수냐 따지는 이념적 편가르기, 즉 이념적 양극화는 한국이 복잡다단한 위험요소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이 최근들어 부쩍 자주 사용해온 ‘창조적 실용주의’ 개념을 설명하며 “이것만이 협소하고 반향없는 이념의 신기루에서 헤어나서 현실에 기초해 진정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등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정치적 리더십의 위기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도”라고 주창했다.
“보혁 이념논쟁은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거듭 강조한 그는 “위기 속에 기회의 씨앗이 있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고 불확실성 속에서의 희망을 더듬은 뒤 “창조적 실용주의야말로 그러한 기회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결론지었다.
질의응답에서 한미관계, 한중관계, 북핵 6자회담, 북한 인권문제 등에 대해 교과서적 모범답안을 내놓은 그는 스탠포드대 천체물리연구소 배태일 박사가 “(고 전 총리의) 대선출마는 공개된 비밀”이라며 출마의사를 묻자 “지금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겨우 절반 지난 시점에서 어느 특정개인의 야망이나 대선출마를 얘기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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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전 총리가 말한 ‘창조적 실용주의’는…
첫째, 소통과 유대에 주안점을 두는 리더십을 향상시키고, 둘째,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잘 잡으면 된다는 덩샤오핑 전 중국최고지도자의 개혁이론처럼 실질적 수행성과를 중시하며, 셋째, 상생의 리더십을 발휘해 공동선을 수호하고, 넷째, 활동사진술을 발명한 것은 토마스 에디슨이지만 이를 20세기 최대 문화산업으로 발전시킨 것은 뉴욕의 자본가와 할리웃의 영화제작자들이듯이 지속적 혁신을 모색하며, 다섯째, 지구촌 다른 사회와의 조화를 꾀하는 열린 리더십을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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