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절 특별인터뷰-101세 신후식 목사 회고
“아침에 일어나니까 어른들이 모여서 수근수근 하더라구요. 아버지께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내일 독립 만세 운동을 벌인다는 거예요. 같이 태극기도 만들며 준비를 했습니다. 다음날 8일 드디어 마을주민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20리를 걸어 화목시장까지 갔어요. 인근 모든 마을 주민들이 총동원되니 대단해 보였습니다.”
워싱턴 한인사회 최고령 원로인 신후식 목사(사진.101세)가 회고하는 3.1절 당시의 기억이다.
1919년 당시 그의 나이 14살. 독립만세운동의 정확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나이였다. 경북 청송군 현서면 복동의 시골 소년은 학교에도 갈 수 없었던 어렵고 가난한 시절이었다.
동네 어른들을 따라 참가한 만세운동은 며칠 간 계속됐다. 대도시 소식이 늦게 전달되다 보니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을 나중에 알고 늦게 동참했지만 나라사랑의 열기만큼은 뒤지지 않았다.
“화목시장에 주재소가 하나 있었습니다. 수 천명의 군중들이 몰려들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니까 막는다고 공포탄을 쏘면서 막아보려고 애썼지만 주민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어요. 친구들과 함께 ‘만세 만세 만만세, 대한독립 만만세’를 흥이나서 목청껏 불렀습니다.”
신 목사 기억에 순사들 가운데는 한국인도 있었는데 그는 동료들이 군중에게 총을 쏘는 모습을 보고는 분개해 자신의 총을 바위에 내리쳐 부셔버렸다. 나중에 힐책을 받게 되자 “만세 군중들에게 위협하려고 그랬다”고 변명을 하더라고 신 목사는 기억했다.
218개 군 가운데 211개 군이 참가, 사실상 전국민이 참여했던 독립만세운동은 신후식 소년이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던 것은 물론이다.
신 목사의 만세운동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진다. 이 사건은 평양 숭실전문학교 재학 때였는데 그해 10월에 시작된 만세운동의 불길은 12월이 됐을 때 평양 전체를휩싸고 있었다. 분연히 동료 학생들과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한달간 감옥생활을 했다. 신 목사는 “이 때는 독립 만세운동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지도 결연했다”고 회고했다.
올해 87번째 3.1절을 맞이하지만 그날의 감격은 아직 살아 있다. “우리 민족이 그처럼 하나로 뭉쳤던 경우는 역사 이래 없었던 것 같다”는 신 목사는 “3.1 정신 계승이란 민족의 정체성과 주권의 소중함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치권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민족의 얼과 전통, 역사를 모르고 바람부는 대로 휩쓸려 다니는 모습이 안스럽기만 하다.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던 1905년 6월26일 경북 청송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풍타낭타(風打浪打)’의 연속”이라고 스스로 표현한 것처럼 격동의 시대를 지내온 그는 “3.1 운동의 교훈은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됐을 때 발휘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재차 역설했다.
<이병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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