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USC가 도산 하우스를 과거 공과대학 건물 자리에서 옮겨 새롭게 단장하여 한국학연구소로 출범시켰다. 도산 하우스는 USC의 대학 교회와 JEP 하우스(제4대 총장 보바드가 살았던 집)와 함께 역사탐방 코스의 하나가 되었다.
앞으로 연구소는 미주 한인사회, 동북아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과 관련된 연구와 강의를 신설할 계획이라고 한다.
1930~40년대에 도산 하우스는 제퍼슨가에 자리한 대한인국민회와 함께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한인들의 커뮤니티 센터, 사랑방 역할을 했다. 도산 선생은 이 곳에 기거하신 적이 없으나, 부인 이혜련 여사와 다섯 자녀가 1937년에서 1946년까지 10년간 살았다.
필자는 내부를 돌아보면서 2층 서재에 걸려 있는 도산 선생과 두 딸(수산, 수라)이 함께 찍은 사진 앞에 한동안 서있었다.
“나는 너희들을 믿는다. 엄마 잘 모시고 오빠들과 잘 지내주길 바란다” “네! 아빠. 염려 마세요” “그래 그래 고맙다”라는 대화를 부녀간에 나누는 듯했다.
몇 년 전 모시에다 물감 먹여 색깔별로 재단하여 만든 흥사단 단기를 만지며 안수산 여사는 “이건. 울 엄마가 만들었어” 하시며 무엇인가를 회상하는 것 같았다. 좀이 먹어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지만 이혜련 여사의 정성을 엿볼 수 있었다.
‘나의 사랑 혜련에게’로 시작하는 도산 선생의 서신(부인과 자녀에게 보낸 편지 126통)은 항상 일기장을 읽어 내리듯 내용이 진솔했다. 부인에게 흥사단 정신으로 훌륭한 생각을 품고 극복해달라고 당부하셨다.
도산 선생이 이혜련 여사와 결혼한 기간은 36년이고, 미국에 체류한 기간은 13년이다. 거기서 또 북미, 멕시코 등지의 출장을 빼면 실제로 같이 산 기간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이러한 도산의 가족을 지켜주고 보호해 준 분들이 이곳의 동포들이었다. 도산이 가족을 떠나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도 든든한 가족과 미국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을 뒷받침한 것이 이곳 동포들이었다.
상해 임시정부 2층 청사를 빌리고(2만5,000달러), 폭탄사고로 인한 합의금(1만달러), 여러 행사에 충당되는 대부분의 비용들이 이곳의 동포들에 의해 지원되었다. 그 당시 동포들의 주된 수입원과 화폐 가치로 미루어보아 엄청난 금액이었다.(이혜련 여사의 최고 좋았던 수입은 일당 2달러여. 현재 가치로 45달러 수준이다.)
최근 몇 년간 도산 선생을 기리는 여러 사업들을 지켜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훌륭한 스승을 잘 모시는 분들은 스승 못지 않게 훌륭한 친구이고 제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인 동포들 스스로가 모두 작은 도산, 제2 제3의 도산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도산 선생은 우리에게 훌륭한 미국시민이 되도록 가르치셨듯이, 지금은 국제사회에서 신뢰받고 자랑스런 민족으로 성장하도록 가르치실 것이다.
우리 민족은 세계 각 곳으로 흩어져 사는 민족으로 세계 4위이다. 유대인, 중국인, 로마-이탈리아인 다음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민족경영’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한민족 전체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마침 도산 하우스에 한국학연구소가 출범하게 되었으니 그에 거는 기대가 크다.
이창수 흥사단 미주위원부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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