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는 100년 전에 서해 소야도라는 작은 섬에서 가난한 어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자식은 꼭 배워야 한다는 할아버지 덕분에 서양 학문을 공부하실 수 있었고 그 후 고향에서 사리사욕이 없는 공무원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사셨다. 23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아버지는 유머를 아셨고 허례허식을 싫어하셨고 근검절약을 유언처럼 말씀하셨다.
우리 집안이 언제부터 이 섬에서 살게 되었느냐고 어렸을 때 아버지께 여쭈었더니 500여년 전 임진왜란 때 나의 10대 이전 할아버지가 난리를 피해 이 섬에 들어 오셔서 그때부터라고 대답하셨다.
아버지께서 20살쯤 되셨을 때 공부하시던 배재학당에서 방학을 맞아 인천에서 고향으로 가시려던 때 마땅한 배편이 없자 아버지께서는 당시 아무도 생각조차 못해본 모험을 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어선 두 척을 가지고 계셨는데 어선에 필요한 12피트쯤 길이의 작은 연락선(뎀마라고 부름)을 인천에 주문해 놨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찾아 친척 어른 한분을 설득해서 돛대를 세우고 돛을 달았다. 먹을 것을 챙겨 싣고는 노와 돛에 의지하여 사흘인가 나흘만에 소야도에 도착하셨다.
엔진이나 통신장비가 발달한 오늘날에는 16세 소녀도 혼자 세계 일주를 하다가 여차하면 구조를 요청하면 되지만 그게 없던 그 당시로선 기막힌 모험이었다고 한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어느 날 아버지는 사랑방의 고장난 벽시계를 내려서 고치고 계셨다. “아버지, 시계고치는 거 언제 배우셨어요?” “안 배웠다” “그런데 어떻게 고치세요?” “이거 만든 사람도 있는데 우리는 고칠줄은 알아야 하지 않겠냐?” 또 정미소를 혼자 짓고 기계를 설치하시는 것을 보면서 나도 ‘하면 된다’는 것을 그때 배운 것 같다.
아버지는 남에게는 친절하셨는데 가족에겐 사랑표현을 안 해주셨다.
추석 때인 것 같다. 아버지와 둘이서, 덕적도에서 나룻배를 타고, 할아버지 계신 소야도로 가는 도중에 어두워서 산길을 피해 바닷가 모래위를 걸었다.
그때, 세상에 이럴 수가! 아버지가 나를 업어 주시는 것이었다! 내가 군대를 마치고 잠시 아버지가 하시던 집안일을 도와 드릴 때였는데 아버지는 기분이 좋으셔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시다가 학창시절에 보신 영화 아리랑에서 나운규의 흉내를 내셨다. 인상을 쓰시며, 뒷걸음질 치시며, 어느 아들이 그런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아버지의 불행했던 일들도 기억한다.
그러나 시간을 내어 내가 기억하는 사실들을 기록할 것이다.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세월은 기억을 무디게 할뿐만 아니라 사라지게 한다. 나는 이민 일세로서 나중에 이 땅에 사는 후손들이 내가 어떤 할아버지인지 궁금해 하지 않게 하고 싶다. 집안의 좋은 것, 궂은 것 모두는 나에게나 후손에게 귀한 밑거름이다.
나에게는 과거 10대조 이전 가문이 어떠했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조상이 양반이라 해도 후손이 복되게 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조상가운데 부끄러운 일이 있었더라도, 마음을 낮추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잘살게 되면 복된 일 아닌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원고지 한 장의 글을 남기셨다.
“…저의 죄를 씻을 길은 예수님의 피밖에 없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편히 쉬세요.
조영길 선교사/스프링필드,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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