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총재산 50달러로 미국 유학생활을 시작한 나는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터에서 뛰어야 했다. 필라델피아 베들레햄 스틸에서 건축자재 철근을 건축업자들의 주문에 따라 기계로 자르는 일을 했다. 세사람이 1조가 되어 서로 맡은 부문을 수행하는 일관작업이었다. 나는 언어도 서투른데다 힘도 약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나 모든 직원들은 유일한 유학생인 나에게 각별한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한번은 내가 무거운 철근을 옮기다가 내 잘못으로 팔뚝에 조그마한 상처를 입었다. 공장장을 포함한 많은 직원들이 달려와서 나를 위로했다. 나는 그들이 베풀어 준 친절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대학 재학 중 서울 소공동에 있는 국립도서관에서 일한 적이 있다. 무더운 장마철 출근길에 옷은 푹 젖었으며 구두에는 진흙이 잔뜩 묻어있었다. 내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나의 상사는 내 모습을 보고 그의 사무실로 데려가 내가 복도를 더럽힌 것에 대해 참기 힘든 말투로 나를 질책했다. 나는 90도 허리로 사과를 했지만 그는 분노를 사귀지 못했다. 나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시말서를 쓰고 복도를 깨끗히 닦았다. 나는 지금도 그의 분노하는 모습을 잊지 못한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갑을문화’(甲乙文化)라는 새 용어가 급물살을 타고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 문화는 갑과 을 두 사람 사이 또는 두 그룹 사이에서 불평등한 관계로 이루어지는 문화를 의미한다. 즉 갑은 우월한 위치에서 을을 지배하며, 을은 열등한 위치에서 갑을 떠받드는 관계다. 갑을문화는 원래 갑과 을 두 당사자가 계약서를 작성 할 때 각자의 권리와 의무를 동등한 위치에서 규정하지 않고 강자와 약자의 위치에서 규정한 봉건적 계급사회의 산물이다. 예를 들면 양반과 상민, 또는 오야붕과 꼬붕의 관계다. 이를테면 시장경제 분업체제에서 갑의 대기업과 을의 하도급 업체사이의 관계를 공생(共生)의 원리보다 갑의 지배원리로 보는 문화다.
지난 몇 주 동안 한국 사회는 갑을문화의 현주소를 체험했다. 대한항공 여객기 안에서 포스코 에너지사의 한 상무가 라면을 제대로 끓여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여승무원을 폭행한 ‘라면상무사건,’ 남양유업의 한 영업사원이 제품밀어내기 강매에 항의하는 한 대리점 주인에게 폭언한 ‘조폭우유사건,’ 프라임 베이커리 빵 회사 전 회장이 호텔 주차관리인에게 반말을 하면서 지갑으로 얼굴을 때린 ‘폭행 빵 회장 사건,’ 한 주류업체의 물량 밀어내기와 빚 독촉에 따른 고통을 호소하며 자살한 대리점 주인의 ‘배상면주가 사건’ 등이 보여 준 갑을문화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갑을문화’는 오랜 동안 한국 사회 여러 부문에서 드러나지 않고 묻혀 있으면서 ‘의례 그럴 것이라는 사회적인 상식’으로 여겨져 왔다가 별안간에 뜨거운 사회적인 이슈로 표면화 된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라고 볼 수 있다. 첫째, SNS 유튜브 등 인터넷 망을 통해 ‘갑을문화’의 사회실상이 즉흥적 실시간 보도로 여러 사회계층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 둘째 박근혜정부가 건전한 경제발전의 공약으로 내세운 경제민주화라는 새 개념이 지금까지 굳어져왔던 갑을관계에 새로운 개혁의 바람을 몰고 왔다는 사실이다.
미국에도 ‘갑을문화’가 있다. 예를 들면 대기업과 하도급, 고용주와 고용인, 수요자와 공급자, 임대인과 임차인, 매도인과 매수인 등 한국사회와 비슷한 인간관계를 규정짓는 문화다. 미국에서는 갑을관계 대신 AB관계다. 이 관계는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자유와 평등의 기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다. 강자는 약자를 보호하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지킨다. 물론 한국에 이런 강자가 많다.
선진국을 재는 잣대는 여러가지가 있다. 물론 경제 정치 발전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당연히 선진국 대열에 속한다. 그러나 ‘갑을문화’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사회 구성원사이의 평등 친절 정직 신뢰 자유 인권 등과 같은 도덕적인 인간관계에 촛점을 맞춘 잣대로 볼 때에는 아직 갈 길이 멀지 않을까?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