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 종전 60주년 특별기획
▶ “‘총알받이용 소위’ 인줄도 모르고...”
"산등선을 감싸던 자욱한 아침 안개가 걷히면 아군이 다시 북한군 고지로 올라갑니다. 총알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적고지에 올라서고 보면 이미 소대원의 반이 보이질 않아요. 그렇게 탈취한 고지를 겨우 반나절이 지나서 다시 내줍니다. 이렇게 미친 짓을 반복하는 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한국 전쟁 최대 격전지 중의 한 곳이던 강원도 철원군 등대리. 1951년 7월 육군종합학교를 29기로 졸업한 황익수(82) 옹은 ‘소위’ 계급장을 달자마자 바로 국군 제2연대가 머무르고 있던 등대리 최전선으로 투입됐다.
"6.25가 터질 당시 나는 서울 경복고등학교 3학년생이었어요. 북한군이 물밀듯이 밀려내려오자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다니다가 우여곡절 끝에 부산 육군종합학교에서 장교가 되기 위한 군사훈련을 받았어요. 4개월 뒤 소위로 임관했는데 곧장 최전선으로 향하는 겁니다. 나중에 들었지요. 주위에서 우릴 ‘총알받이용 소모품 소위’로 불렀다는 것을."
그렇게 국군 제2연대에 합류한 윤 씨는 소대장으로 능선 정상의 적 고지를 탈취하라는 임무를 맡고 매일같이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등대리 전선 전투가 가장 격렬했던 1951년 8월30일, 윤 씨의 부대는 적 고지가 위치한 산을 둘러싸고 일제히 진격해 올라갔다. "쌕쌕하는 소리와 함께 적군의 82mm 박격 포탄이 우리 머리위로 수없이 쏟아지는 겁니다. 소대원들의 팔, 다리가 포탄에 맞아 하늘로 솟구쳤지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던 황 옹은 잠시 말을 끊은 채 한동안 눈시울을 훔쳤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나 자신의 안위보다는 소대원들의 죽음이 가장 걱정됐었죠. 이제 갓 20세를 겨우 넘긴 애송이 소대장이었지만 소대원들이 마치 내자식처럼 느껴졌습니다. 다들 저보다 나이도 많았는데 말입니다." 윤 씨는 이날 전투 중 적 수류탄 파편에 맞아 손마디가 거의 날아가고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지만 장렬히 전사한 소대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 위해 끝까지 무릎을 꿇지 않고 앞장서 나갔다. 결국 황 옹이 이끈 부대는 고지를 탈취했지만 그날 등대리 능선은 적군과 뒤엉킨 아군들의 시체로 넘쳐났다. 부대에서 생존한 장교는 황 옹이 유일했다.
"아직도 웃고 있던 소대원들의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다들 젊은 날의 꿈이 있었는데… 전쟁이 모든 걸 앗아갔죠. 전쟁에서 살아났지만 그 아픔들이 쉽게 씻겨지진 않습니다. 우리 후세들에게는 절대로 물려줄 수 없는 기억들입니다." <천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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