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낮엔 서핑·운동, 밤엔 고급 사교클럽 드나들며 무위도식
▶ 용돈 줄이자 분개해 범행…“부유층 자녀 사회 부적응 심각”
[명문대 출신 30대, 백만장자 아버지 총격살해]
지난 1월5일, 명문대 출신의 30세 백수가 헤지펀드 매니저인 백만장자 아버지를 총으로 쏘아 숨지게 한 존속살해 사건이 터지자 ‘여론의 광장’을 자처하는 온라인 소셜미디어는 갑작스레 몰려든 방문객들로 술렁거렸다. 네티즌들은 경쟁적으로 용의자인 토머스 길버트 주니어의 신상털이에 나섰고 블로거들은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난 부유층 가정의 병폐를 설명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네티즌들이 수집한 신상정보에 따르면 길버트 주니어는 프린스턴대를 졸업한 고학력 청년 실업자였다. 대학 졸업 후 변변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취업전선에서 일찌감치 도태됐지만 이력서에 적힌 그의 학력은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
어퍼 이스트사이드에 위치한 명문사립 버클리 스쿨과 맨해턴에 자리 잡은 디어필드 아카데미에서 중·고교과정을 마친 후 프린스턴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았으니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셈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대학 졸업 후 그의 하루 일과는 거의 예외 없이 서핑과 운동으로 채워졌다. 낮에는 해변가와 체육관에서 시간을 보냈고, 밤에는 정장을 요구하는 맨해턴의 고급 사교클럽을 드나들었다.
한때 그의 여자 친구였던 앤나 로스차일드는 길버트 주니어를 “키 크고 잘 생긴 용모에 운동으로 다져진 날렵한 몸매”를 지닌 ‘전도막막’한 청년 실업자”로 평가했다. 겉보기엔 그럴듯하지만 실속은 전혀 없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냉정한 품평이다. 말로는 펀드사 설립을 추진 중이라고 뻥을 쳤지만 전화 한 통 걸려오는 법이 없었다.
일정한 직업이 없는 30세 청년 백수는 생활비 전액을 헤지펀드 매니저인 아버지 길버트 시니어(70)에게 의존했다.
웨인스캇 캐피털 파트너스의 창업주인 길버트 시니어는 아들에게 매달 2,400달러의 렌트비와 600달러의 용돈을 지급해 주었다. 그러나 아들이 홀로서기 의사를 전혀 보이지 않자 최근 용돈을 600달러에서 400달러로 200달러 깎았다는 게 경찰 측 발표다. 철없는 아들에게 제재를 가한 것이다.
아들은 발끈했다. 그가 거칠게 항의하자 아버지는 “앞으로 용돈을 200달러로 더 깎을 예정이니 알아서 하라”며 추가 제재를 예고했다. 이에 대해 길버트 주니어는 자신의 여자 친구에게 “우리 꼰대는 정말 인색하고 쫀쫀하다”며 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용돈을 둘러싸고 심하게 훼손된 부자관계는 지난 5일 길버트 주니어가 4개월 만에 처음으로 뉴욕 햄턴에 위치한 월세 6,000달러짜리 아버지의 집에 예고 없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파국을 맞는다.
기소장에 따르면 길버트는 “샌드위치를 사다 달라”며 어머니 셸리(67)를 밖으로 내보낸 후 방안으로 들어가 다짜고짜 아버지의 이마에 한 발의 총격을 가했다. 끔찍한 패륜을 저지른 그는 자살로 보이도록 사건현장을 위장한 다음 어머니가 돌아오기 전에 달아났다.
셸리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길버트 주니어의 아파트를 급습했을 때 그는 도주를 위해 이미 짐 가방까지 싸놓은 상태였다. 경찰은 범행을 저지르고 집으로 돌아온 길버트가 가방을 싸기 전 전자게임을 했다고 밝혔다.
그의 아파트에는 탄창과 탄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21개의 신용카드와 카드 복제기도 나왔다. 부족한 용돈을 그가 어떻게 보충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길버트는 지난해 9월15일 새그 메인 스트릿의 고급 주택 방화사건과 관련해 경찰의 수사선상에 올라 있는 유력한 용의자이기도 하다. 아직 정식으로 기소된 것은 아니지만 경찰은 월스트릿의 ‘큰손’인 피터 스미스의 아들과 여자문제로 다투다 홧김에 그의 애견을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살인사건 전모가 공개되고 길버트의 어두운 과거가 부분적으로 드러나자 트위터에는 그를 ‘최고의 싸가지’ ‘구역질나는 패륜아’ 등으로 비난하고 매도하는 댓글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수많은 팔로워들을 이끄는 중견 블로거들은 명문대 출신 청년 실업자를 살인자로 만든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를 분석하는데 주력했다.
이들은 길버트 주니어를 요즘 부쩍 주목을 받는 ‘부자병’ 환자로 본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알콜과 마약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중독, 가정 내 절도, 폭력 등은 ‘있는 집’ 자식보다 ‘없는 집’ 아이들 사이에서 자주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심리학자인 수니야 루타르는 빈곤에 관한 연구를 하던 중 빈민층 가정 자녀들보다 부유층 가정 자식들 가운데 우울증과 약물중독 발생률이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애리조나 주립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루타르는 연 중간소득이 15만달러 이상인 고소득 가구들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연구를 실시했고, 1999년 이 같은 사실을 재확인하는 논문을 내놓았다.
부자병 환자는 타인과의 적절한 관계설정에 어려움을 느끼며 심한 경우 사회적·심리적 일탈증세를 보인다. 감정통제가 잘 안 되고 우울증과 조울증에 시달리며 강박증세를 자주 노출한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내가 아닌 남에게서 찾으려 드는 것도 이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증상 중 하나다.
전문가들은 부유한 가정이나 명문가의 자녀들이 느끼는 가장 큰 부담은 부모, 특히 성공한 아버지의 높은 기대감이라고 입을 모은다.
부와 명예를 일군 잘난 아버지는 거의 예외 없이 자신의 화려한 학벌과 인맥과 경제적 풍요가 자식 대에서 반복되거나 확대 재생산 되기를 원한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아버지는 막대한 투자를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의 무차별 지원은 ‘양날의 칼’이다. 자칫하다간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도움을 주기보다 오히려 상처를 입힌다.
잘난 아버지의 높은 기대감을 만족시키지 못한 자식에겐 아버지의 질책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감에 쫓기곤 한다.
반면 성공한 부모가 충분히 주지 못하는 것이 있다. 함께하는 시간이다.
사립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중상층 이상 가정의 부부는 대부분 전문직 직종에 종사하는 맞벌이 부부다. 어렵게 쌓아올린 커리어와 소득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 24시간이 짧다 하고 뛰는 워커홀릭이다. 이들의 일과표에는 자녀를 위한 시간은 거의 담겨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부모가 롤모델이 되는 가정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성장한다. 이들에게 가치의 혼란이 찾아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2012년 테레스 룬드와 에릭 디어링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부유한 교외에 거주하는 청소년들은 그보다 낮은 소득층에 속한 도시 아이들에 비해 부모의 지갑에 손을 대는 비율이 높다. 그리고 이런 도벽은 대략 7학년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강력한 물질적 욕구가 조기에 발현된다는 얘기다.
아무튼 길버트는 여론의 동정을 등에 업기 힘들다. 아버지의 과도한 기대와 그로 인한 실망은 그나마 아들에 대한 사랑을 바탕에 깔고 있었지만, 길버트의 가슴 속에 아버지는 ‘저금통장’에 불과했다. 그는 가치전도를 일으킨 부자병 환자였다.
<뉴욕타임스 본보 특약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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