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선 (전 한인회 회장)
계절이 깊어지나 보다. 옷깃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이 어제보다 차갑게 몸 속 깊이 박힌다. 이른 새벽이나 해 저문 시간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빠지는 것을 보면서 공연히 마음이 조급해 진다. 문득 우주의 운행 안에서 언젠가는 건너가야 할 내일과 기억 속의 세월이 별처럼 스쳐 간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 집에 간다는 것은 며칠 전부터 마음을 설레게 하는 수학여행 같은 것이었다. 또한 어린소년이 처음 마주해야 하는 묵직한 두려움의 기억이기도 했다.
우선 외갓집에 가기 위해서는 마을 입구에 있는 무당집을 지나야 했는데, 어린 아이의 눈에도 문 밖에 달아 놓은 형형색색의 깃발과 마당 한 가운데 높이 세워 놓은 만신기는 꼭 이승과 저승을 판별하는 심판자의 집 같아 보여서 무섭고 두려웠다.
그 공포스러운 집을 지나 겨우 마음을 추스리면 당시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이층 양옥집을 지나가야 했다. 외삼촌들은 그 집을 이장 댁이라고 불렀는데 붉은 벽돌을 높이 쌓아 올려 감히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요새처럼 보였다. 겁 많은 작은 소년에게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고 때론 경외스럽기까지 한 기억 너머에는 그 집 마당을 지키던 개 한 마리가 있다.
높지 않은 담장 안에서 지나가는 행인의 인기척에 예민하게 반응하여 나를 무척이나 긴장하게 만들어서 그 집 앞을 지나갈 때 마다 뜀박질을 하게 만들었다.
다급한 발자국 소리에 더욱 사납게 짖어대던 소리가 등 뒤로 아득히 멀어 질 즈음, 외갓집 마당에 들어서면 숨이 턱까지 차올라 왔다. 나는 가쁜 숨을 고르며 목을 축이려고 우물가로 달려가 급하게 펌프질을 했었다.
그러나 바짝 마른 펌프는 기대하던 차가운 샘물을 끌어 내지 못하고 애를 태웠다. 마루 끝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는 한 바가지의 물을 펌프에 넣어 주셨다. 순간 펌프는 몇 번의 펌프질로 큰 샘물이 되어 물을 쏟아 냈다. 그 한 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할머니가 건네준 한 바가지의 물, 그 물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득 문득 떠오르는 그리움의 독백이며 삶의 지혜가 되었다.
추억의 단편들이 떠오르니 그 오래된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 같이 느껴진다. 친구들과 어울려 이 골목 저 골목 뛰어 다니다 흘깃 석양을 보고 안절부절 하던 소년이 있다.
대문 밖까지 나와 골목 끝을 향해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시던 외할머니의 모습도 떠오른다. 집집마다 달게 익어 가던 주홍 빛 감나무가, 누렇게 여물던 늙은 호박이 오늘 다시 마주 선 가을빛으로 익어 간다. 오래 전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외갓집이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되어 어린시절의 나를 만나게 해 주었다.
나뭇잎이 떨어지면 여름 내내 보이지 않던 숲이 그 얼굴을 드러낸다. 죽어 가는 모든 것의 배경이 되어 주어 더 아름다운 숲, 가을을 맞이한다는 것은 결국 모두가 숲이 되어 가는 것이리라. 여름이 되기까지 품었던 그 모든 것들을 하나씩 놓아 버리고 내려놓는 것, 어쩌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준비 하는 계절이 가을인 것 같다.
다가올 시간은 점점 더 어두워 질 것이고 또 언젠가는 가지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놓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오지 않을 지나간 시간, 그 희미한 기억에 매달리게 될 지도 모르겠다.
가을의 오후가 끝나는 창으로 엷은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져 만들어 낸 풍경이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같다. 아직 남아 있는 밝음과 어둠은 셈하지 않아도 좋은 가을, 그 오후, 침묵으로 마음 안에 깊은 성호를 그으며 안부를 묻는다. ‘별일 없지요…?’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