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 ‘외지’ 하와이 머물다 면직돼

초대 내각 포스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촬영 이충원]
국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이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으로 이어지게 되면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이승만 대통령 이후 두번째로 탄핵당한 대통령으로 기록된다. 물론 헌정 사상으로는 박 대통령이 최초라는 오명을 쓰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1960년 4·19 혁명으로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그는 이 '하야' 이전에 탄핵당한 적이 있다.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의 일이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가 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에 따르면 1919년 3·1 운동 이후 이승만 박사는 민족의 대표적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다.
3·1 운동 이후 수립된 국내외 임시정부 6곳에 이승만이 국무총리, 부통령, 집정관총재 등 수반급 지도자로 추대·선출됐기 때문이다.
이어 1919년 9월 러시아 연해주, 중국 상하이, 서울에 있는 주요 임시정부 3개가 통합하고, 이승만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오른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대 여론이 초반부터 적지 않았다. 단재 신채호는 '위임통치를 청원한 자'가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반대했다. 이승만이 1919년 2월 당시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을 국제연맹의 통치에 두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보낸 것을 질타한 것이다.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인 이동휘와도 의견 차이가 컸다. 대한제국 시절 육군 장교 출신인 그는 무장 독립투쟁을 주장했고 외교 노선을 고집한 이승만과 갈등을 빚었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임에도 미국에 머물고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오지 않은 점도 그에 대한 불만을 가중시켰다.
이승만은 상하이의 일은 국무총리에게 맡기고 자신은 미주의 일을 담당하겠다고 하고서 임시정부에 할 이야기가 있으면 전문을 보냈다.
자신에 대한 불만이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자 이승만은 결국 1920년 12월 상하이로 부임한다. 하지만 상하이에서 활동한 기간은 대통령 재직 기간인 5년 6개월 중 6개월에 불과했다.
잠시 상하이에 있는 동안 대통령직 사퇴 요구가 빗발치자 이승만은 결국 미국 하와이로 돌아갔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의 국회 격인 의정원은 1924년 6월 이승만 대통령을 유고로 처리하고 국무총리가 대통령 직무를 대리케 하자고 제의하기에 이른다. 그해 12월에는 박은식을 국무총리 겸 임시대통령대리로 하는 새 내각이 출범한다. 이승만은 "림시정부 변란"이라고 반발했으나 반대 여론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1925년 3월 14일 탄핵안이 의정원에 제출됐고, 같은 달 18일에 통과됐다.
탄핵안을 심리한 심판위원회는 대통령이 현지를 떠나 외지에 있으면서 임시정부를 돌보지 않은 점을 면직 사유로 들었다.
대통령이 부임지를 지키지 않았다는 지적은 이른바 박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연합뉴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