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가이자 박물학자·식물·곤충학자 일부 실수 불구 ‘시대 앞서 간 여성’
▶ 대표작 ‘수리남 곤충의 변형’재출간 암스테르담서 6월 국제 심포지엄

독일에서 태어나 네덜란드에서 살았던 마리아 시빌라 메리안은 화가, 식물학자, 박물학자, 곤충학자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사진 nytimes.com]
■ 여류 과학자 마리아 시빌라 메리안 사후 300년만에 재조명
마리아 시빌라 메리안(Maria Sibylla Merian)은 17세기 독일에서 태어나 네덜란드에서 살았던 여성이다. 그 당시 유럽의 여성들이 모두 그랬듯이 가사일과 아이들 양육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메리안에게는 한가지 더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 화가이며 식물학자, 박물학자, 곤충학자로서의 커리어였다.
과학사에서 메리안이 남긴 업적을 연구하고 있는 펜실베니아 게티스버그 칼리지의 생물학자 케일 에더리지는 “다윈처럼 생물학의 흐름을 돌려놓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메리안은 굉장히 중요한 과학자였다”고 말했다.
박물학이 아주 귀중한 도구였던 시절에 메리안은 식물과 곤충에 관해 사람들이 전혀 몰랐던 사실들을 많이 발견해냈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곤충이 진흙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다고 믿었으나 그녀의 관찰로 인해 그렇지 않음이 밝혀졌다. 그녀가 수십년간 관찰하고 수집한 정보들은 자연에 관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의학과 과학 분야에 대단히 중요한 통찰력을 제시해주었다. 그녀는 곤충들의 생태계를 처음 밝혀낸 인물이다.
메리안은 곤충들을 자세하게 묘사한 그림 책을 여러권 출간해 유럽인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으며, 52세 때이던 1699년 정글에서 서식하는 곤충을 연구하기 위해 딸과 함께 당시 네덜란드령이었던 남아메리카의 수리남 공화국까지 무려 5,000마일을 여행했다. 그 여행에서 나온 책이 역작 ‘수리남 곤충의 변형’(Metamorphosis Insectorum Surinamensium)이다.
이 책에서 그녀는 이국적이고 드러매틱하며, 신기한 자연의 세계를 밝혀내 굉장한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1세기 후 메리안의 발견들은 과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조잡한 복제판들이 오히려 그녀의 업적을 깎아내렸다. 게다가 유럽에서 여성의 지위가 후퇴했던 18세기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지나며 그녀의 연구 성과는 대부분 잊히고 말았다.
자연과학의 선구자였던 메리안의 이름이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최근이다. 근년 들어 페미니스트, 역사학자, 예술가들이 모두 메리안의 재능과 끈기, 영감으로 가득 찬 예술적 구성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닥터 에더리지는 그녀의 회화 작품에 나오는 과학적 내용을 연구하고 있다. 그녀의 사후 300년이 되는 올해 6월, 암스테르담에서 열리는 국제 심포지엄에서는 메리안의 영예를 드높이는 행사가 열리게 된다.
지난달에는 ‘수리남 곤충의 변형’이 재출간됐다. 이 책에는 60개의 오리지널 세부 그림들과 함께 메리안의 생애, 그리고 업데이트 된 과학정보 등이 담겨있다.
메리안이 식물과 곤충에 관해 심취하게 된 것은 20대 때 꽃과 곤충을 정교하게 묘사한 그림을 자주 그려본 데서 비롯됐다. 그러다보니 더 몰두하게 됐고 아예 집에서 나비와 애벌레 같은 곤충들을 기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밤이면 그 앞에서 기다리고 앉아 있다가 번데기 속에서 나비가 나오는 모습을 그리곤 했다. 이처럼 유럽의 곤충들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정교한 그림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낸 책은 당시 유럽인들이 전혀 가보지 못하던 지역의 곤충과 양서류, 파충류들로 확장됐다.
메리안은 확대경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박각시나방의 그림을 보면 혀가 갈라져있는 묘사가 나오는데 확대경 없이는 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각시나방이 꿀을 마실 때는 2개의 혀가 연결돼 하나의 튜브를 이룬다고 썼던 그녀의 관찰에 대해 훗날 일부 학자들은 원래 혀가 하나라고 비판을 퍼부었다. 그러나 메리안이 틀린게 아니었다. 번데기에서 막 빠져나온 나방은 잠깐 동안 혀가 2개의 관으로 갈라져 있다가 하나가 되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메리안은 또 거대한 타란툴라 독거미가 벌새를 잡아먹는 장면도 그려서 화제를 모았는데 그 시대 여성들로서는 꿈도 못 꿀 대담함이었다. 닥터 에더리지가 ‘혁명적’이라고 표현한 이 그림은 개미들의 움직임도 상세히 보여줌으로써 당시 유럽 사람들에게 굉장한 흥밋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빅토리아 시대로 들어서자 그녀의 그림들은 부정확하게 재생됐고, 어떤 관찰은 말도 안 된다는 이유로 ‘웃기는 여자’로 치부됐다. 거미가 벌새를 잡아 먹는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찰스 다윈의 친구인 헨리 월터 베이츠는 자신의 관찰을 통해 메리안이 옳았음을 1863년 책에 기술했다.
벌새를 먹는 독거미, 자기 몸으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는 개미 등 대부분의 메리안의 관찰은 정확했지만 모두 맞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그림에서 군대개미와 절엽개미를 함께 묶어서 그린 것이나, 보통 벌새 둥지에는 2개의 알이 있는데 4개를 그린 것은 부정확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수리남 곤충의 변형’ 책에 나오는 나비와 애벌레 가운데 일치하지 않는 그림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녀가 병이 나서 수리남 여행을 중단하고 돌아와 암스테르담에서 책을 완성했다는 사실과 역사상 많은 훌륭한 과학자들도 실수를 밥 먹듯이 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찰스 다윈이나 아이작 뉴튼의 책에서도 유명한 실수가 많이 나왔다”고 말한 에더리지 막사는 유독 메리안에 대해서만 실수만 크게 부각됐음을 지적했다.

불나방이 애벌레에서 변형한 모습을 그린 그림.

박각시나방의 혀가 갈라진 모습을 묘사한 그림.

거미가 벌새를 잡아먹는 모습을 그린 드로잉은 훗 날 말도 안 된다며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한편 그 모든 업적이 메리안 혼자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식물의 이름을 짓는 일과 다른 사람의 연구를 참조하는 일, 그림을 새기는 일 등에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고, 그녀의 딸들이 그림에 색칠하는 것을 돕곤 했다. 또 수리남에서는 그곳 현지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기록을 남겼고, 봉황목을 묘사한 곳에서는 그녀를 도와준 노예들의 힘들고 부당한 삶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네덜란드인 주인들에게 학대당하는 인디언들은 봉황목의 씨를 사용해 아이를 유산하고 있다. 자기들과 같은 노예로 만들지 않으려는 것이다. 기니아와 앙골라에서 온 흑인 노예들은 아기를 낳지 않겠다고 협박함으로써 인간적인 대우를 호소하기도 했다. 심하게 학대당하는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그러면 자유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스탠포드 대학의 론다 쉬빙거 과학사 교수는 이 구절이 무척 충격적이라고 말한다. 식민주의와 노예제도의 부당함을 자세하게 직접적으로 묘사한 것과 여성들이 약을 사용해 출산을 조절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 것이 놀랍다는 것이다. 특히나 수세기가 지나도록 사회 정의와 여성의 권리 등의 이슈들이 아직도 논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그는 “메리안은 시대를 앞서 간 여성이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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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The New York Times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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