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요가 자기 몸만 한 굽은 부리를 진흙에 찔러넣더니 어디 숨어 있었는지 모를 게를 능숙히 끄집어 낸다. 각양각색의 새 수십 마리가 쉴 새 없이 게며 조개며 낙지를 먹어 치워도 갯벌은 그저 풍요롭다. 서천갯벌은 혹독한 시베리아 추위를 피해 월동한 철새의 낙원이자, 더 남쪽으로 가야 하는 나그네새(한국에서 월동하지 않고 휴식 후 남하하는 새)의 휴식처다. 110여 종 90만 마리의 물새가 이곳에서 겨울이나 여름 또는 한 해를 보낸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갯벌’ 4곳(충남 서천, 전북 고창, 전남 신안, 보성·순천) 중 가장 많은 새가 찾는 곳이다. 서해 물때에 따라 변화하는 천혜의 경관, 금강변의 민물 생태계, 계절 변화를 알리는 철새 군무가 어우러진 서천은 생태관광(에코 투어리즘)의 적지다.
■ 금강하구의 마지막 철새 안식처, 서천갯벌매년 수십만 마리의 물새가 서천을 찾는 이유는 지리적 위치에 있다. 한반도는 세계 9대 철새이동경로 중 동아시아-대양주 철새이동경로(East Asian-Australasian Flyway)상에 있다. 북극권 시베리아·알래스카부터 호주를 잇는 1만3,000㎞에 달하는 비행경로다. 먼 거리를 쉬지 않고는 이동할 수 없으니 많은 철새 무리가 한반도에서 원기를 보충하고 여정을 이어간다. 새들의 먹이가 되는 저서생물(바다 강 호수 등의 바닥에 서식하는 생물)이 풍부하고 사람 왕래가 적은 갯벌이 ‘새 휴게소’로 제격인 셈이다.
넓은 갯벌이 펼쳐진 서천·군산 금강하구는 예로부터 철새 도래지로 유명했다. 하지만 군산 앞바다가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매립되며 서천이 철새들의 마지막 안식처가 됐다. 1989년 서천 앞바다가 군장(군산·장항)국가산업단지로 지정되면서 서천갯벌 역시 사라질 뻔했다. 기나긴 논쟁 끝에 2007년 산업단지를 내륙으로 옮기고 국립생태원과 국립해양생물자원관 등 생태기관을 대신 유치해 개발 노선에서 유턴했다. 서천갯벌이 이듬해 습지보호지역에, 2009년에는 람사르 습지에 지정돼 ‘생태 지역’으로 정체성을 확고히 다졌고 202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이르렀다.
서천갯벌 중 철새 도래지 및 물새 서식지로 가장 유명한 곳은 유부도갯벌이다. 금강하구 앞바다다. 과거 금강이 자유롭게 흘렀을 때 퇴적된 유기물이 풍요로운 생태계를 조성했다. 모래갯벌과 펄갯벌이 섞여 저서생물의 다양성이 어느 곳보다 뛰어나다. 백합 동죽 칠게 등 철새 먹잇감이 풍부하다. 덕분에 갯벌이 드러나는 물때면 새의 부리질과 주민들 해루질로 분주하다.
조수간만 차가 특히 커 썰물 때면 유부도 주위로 섬 면적의 20배에 달하는 갯벌이 부상한다. 작은 물길 건너 솔리갯벌까지 더하면 철새에게는 자연이 차려준 대형 뷔페나 다름없다. 이를 바라보는 우리에게는 분주한 새들의 움직임과 갯벌에 그려진 물결 무늬가 한 폭의 명화나 다름없다.
도요새와 물떼새, 오리류가 일대 갯벌을 찾는다. 한반도를 찾는 도요·물떼새 10마리 중 4마리가 유부도와 인근 갯벌을 경유한다고 한다. 개중에는 넓적부리도요 저어새 청다리도요사촌 알락꼬리마도요 검은머리물떼새 등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적색목록 멸종위기 17종도 포함된다.
전 세계 개체 수가 400여 마리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되는 넓적부리도요는 탐조인에게 인기 연예인과 같다. 정기 배편이 없어 주민 어선을 섭외해 입도해야 하는 불편에도 물때가 좋은 날에는 유부도 해안이 탐조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역시 세계적 희귀종인 알락꼬리마도요, 검은머리물떼새도 수천 마리 단위로 무리 지어 다닌다. 도요새 대부분은 나그네새로 알려져 있지만, 마도요는 겨우내 유부도 일대에서 지내기도 한다.
전국 어디보다 밀도 높은 철새를 관측할 수 있지만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이 단점이다. 유부도는 밀물 때만 드나들 수 있고 정기편도 없다. 어선을 섭외하는 비용은 왕복 15만 원 내외로 높다.
입도가 번거롭다면 장항송림을 찾는 것이 훌륭한 대안이다. 장항송림은 유부도갯벌 다음으로 철새가 많이 찾는 솔리갯벌을 접할뿐더러 스카이워크 전망시설이 있어 유부도 앞 대죽도와 소죽도까지 훤히 보인다. 쌍안경이 설치돼 있어 탐조 장비를 굳이 지참할 필요가 없다.
송림 자체도 걷기 좋은 ‘힐링’ 관광지다. 본래 바닷바람을 막는 해안방품림으로 1954년 조성된 역사가 있다. 당시 장항농업고 재학생들이 나무 1만2,000여 그루를 심었다는데 지금은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거대한 숲(27만5,703㎡)이 됐다. 넓은 갯벌과 울창한 소나무숲이 맞닿아 있어 녹청색 파도가 안구를 청아하게 씻어낸다.
철새를 지근거리에서 관측하기 위해선 밀물에 맞춰 가는 것이 좋다. 썰물에는 해안에서 멀리 있는 바다까지 갯벌이 드러나 새들의 활동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 물이 찰수록 먹이활동 구역이 해안에 가까워진다. 물때가 안 맞아 썰물에 가더라도 큰 손해는 아니다.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서천갯벌을 눈에 담을 수 있어서다.
■ 오리·기러기 군무 펼쳐지는 금강하굿둑금강하굿둑 일대 역시 서천 생태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점이다. 강변 갈대밭, 인근 농경지까지 전부 철새 생활권이다. 강물에 사는 민물고기나 논에 사는 작은 생물을 먹이 삼아 월동한다. 갯벌에 도요새와 물떼새가 많다면 하굿둑은 오리 기러기 고니 논병아리가 주된 주민이다.
금강하굿둑 대표 철새는 가창오리다. 하늘을 뒤덮는 장대한 군무와 아름다운 깃털 덕에 인기가 많다. 새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그 장관엔 누구나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다. 전 세계 50만여 마리 중 90%가 한반도에서 월동하고 금강하구가 최대·핵심 월동지다.
하굿둑변에 조류생태전시관이 조성돼 겨울에도 실내 관측이 가능하다. 장항송림 스카이워크와 마찬가지로 시설 내외부에 쌍안경이 설치돼 있다. 수면 위는 물론 강변 수풀 사이, 하늘까지 샅샅이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관측전망대까지 오르기 전 내부 전시관에 일대 철새와 텃새가 전시돼 있으니 외형을 미리 알아두고 가면 좋다.
금강을 거슬러 13㎞ 올라가면 신성리 갈대밭에 다다른다. 금강변 갈대밭 중 가장 잘 알려진 곳이다. 혹자는 순천만, 고천암호, 시화호 갈대밭과 더불어 우리나라 4대 갈대밭으로 꼽는다. 넓고 아름다운 풍경에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드라마 ‘킹덤’ 등 작품 촬영지로도 사랑받고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관리받지 않아 무성하게 자란 갈대밭이었다. 유속이 느린 강 하류에 자연스럽게 흙이 퇴적되고 갈대가 자라더니 날이 갈수록 면적이 늘었다고 한다. 당시 주민들은 이곳에서 자란 갈대를 꺾어 생필품을 만들고 갈대밭에 사는 ‘갈게’를 잡았다.
하굿둑에 자리 잡은 철새가 이곳까지 올라오기도 한다. 1990년대에 금강하굿둑이 완공되고 일대에 논밭이 조성되자 철새 먹이도 풍부해진 덕이다. 갈대꽃이 흐드러지는 11월이 지나고 12월과 이듬해 1월에는 철새 군무가 조금 심심해진 갈대밭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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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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