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한 바닷길을 걷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순백의 단애가 바다를 향해 내리꽂히듯이 깎여 있다. 바다의 거친 파도마저 가소롭게 느껴지는 매서운 절벽이다. 흉터마냥 크고 작은 균열이 난잡한 절벽을 파고든 협곡이 이 청백 비경의 화룡정점이다. 장엄한 해안선에 동해인가 싶지만 이곳은 남해다. 전남 여수시 금오도는 동해에서나 볼 법한 해안단애와 남해 특유의 리아스식해안 지형이 융화된 힘찬 풍경화 한 폭이다. 거친 여수의 섬·바다는 서정적인 ‘여수 밤바다’의 정취에 익숙해진 여행객의 도전정신을 자극한다.
■ 백색 해안단애 두른‘남해의 동해’ 금오도금오도는 여수시 남쪽 바다에 점점이 흩어진 금오열도의 중심 섬이다. 여수에서 가장 큰 섬 돌산도 남쪽으로 화태도·개도·안도 등 크고 작은 섬 30여 개가 모여 금오열도를 이룬다. 대부분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한다. 금오도는 면적 약 26.99㎢로 금오열도 전체 면적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맏형이다. 전남에서 돌산도 다음으로 크고, 전국에서도 스물한 번째로 큰 섬이다. 섬 지형이 거북을 닮아 ‘큰 자라섬’ 금오도(金鰲島)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섬 중앙의 대부산(382m)을 비롯해 망산(343m), 옥녀봉(261m) 등 높고 낮은 산이 솟아 지세가 험준하다. 해안선을 따라 깎인 절벽과 바위 해변, 파도치는 옥빛 남해가 그림 같은 풍광을 빚는다. 작은 포구에 고깃배가 떠 있는 풍경이 정겹기도 하다.
금오도는 조선시대 황장봉산으로 지정됐다. 황장봉산은 왕실이 궁궐 건축이나 전함 제조에 쓸 고품질 소나무를 기르려고 일반 백성의 출입과 벌목을 금지한 산림이다. 봉산 규제가 풀린 1885년(고종 22년)이 돼서야 정주민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사람의 발길이 드물었던 만큼 숲이 기세 좋게 자랐다. 소나무, 동백나무, 대나무가 주요 수종이라 계절을 크게 타지도 않고 늘 푸르다. 바닷바람을 따라 날아든 새들이 숲에 터를 잡았다. 금오도를 걷다 보면 큰 무리를 지어 수평선을 향해 날아가는 새 떼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금오도 서쪽 해안을 굽이굽이 누비는 ‘비렁길’은 금오도 비경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끽할 수 있는 탐방로다. 비렁은 여수 사투리로 벼랑을 가리킨다. 이름처럼 절벽 위를 지나는 길로, 섬 북서쪽 함구미 선착장에서 출발해 남쪽 끝 장지마을까지 5개 코스로 나뉘어진 길이 이어진다. 전체 길이는 약 18.5km에 달한다. 남해안에서는 드문 해안단구 지형이 발달해 고개를 넘을 때마다 기암괴석과 절벽이 계속해 등장한다. 걸음 내내 펼쳐지는 빼어난 풍광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본래 비렁길은 섬 주민들이 마을 사이를 오가며 땔감이나 해산물을 나르던 생활로였다. 가파른 벼랑길을 주민들은 지게까지 지고 다녔다고 한다. 2010년 시가 길을 정비해 공식 탐방로로 만들었다.
옛 섬길의 흔적이 비렁길 곳곳에 남아 있다. 1코스(5km)를 30분 걸으면 마주하는 ‘미역널방’이 대표적이다. 마을 사람들이 바다에서 채취한 미역을 해풍에 말리던 장소다. 절벽 끝에서 내려다보는 시원한 남해 바다 풍경이 일품이라 1코스의 백미로 꼽힌다. 1코스를 약 2시간 걷다 보면 두포마을에 도착한다. 두포는 금오도에서 사람이 가장 먼저 정착한 마을이다. 마을의 옛 이름은 ‘첫개’로 봉산의 사슴을 잡기 위해 파견된 관포수들이 처음 도착한 항구란 뜻이다. 첫개를 한자로 바꾸어 ‘초포(初浦)’가 되고 이후 지금의 이름인 두포로 바뀌었다. 남서쪽을 향한 포구 사이로 지는 석양이 빼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이어지는 2코스(3.5km)는 두포항에서 시작해 직포항까지 이어진다. 거리도 짧아 1시간 30분이면 주파하지만, 해안 절벽을 오르내리는 구간이 있어 마냥 편한 길은 아니다. 굴등 전망대와 촛대바위를 볼 수 있고, 길모퉁이마다 탁 트인 남해 풍광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비렁길 최고 절경을 한 코스 꼽으라면 대부분 3코스(3.5km)를 꼽는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가파른 길이라 산행을 각오해야 한다. 시작점인 직포항은 300년 수령의 해안 노송이 자란다. 코스 초입부터 겨울이 깊어지면 동백이 흐드러질 동백숲도 가세해 여행객을 매혹한다. 깊게 파인 협곡 위를 건너는 현수교 비렁다리는 순간의 짜릿함을 더한다. 연인이 함께 건너면 결혼에 성공한다는 속설이 있다.
동백숲을 지나 있는 갈바람통 전망대 일대 지형은 마치 귀상어의 대가리 같이 양옆이 돌출된 망치 모양이다. 수직 절벽과 해안 협곡이 넓게 펼쳐지고 파도가 거친 곳이다. 오늘의 바람이 어제의 바람과 다르다지만, 주민들에 의하면 섬에서 가장 강한 바람이 부는 지역이라 한다. 이 망치머리 곶을 지나서 이어지는 해안선 역시 금오도에서 가장 복잡해 놓쳐서는 안 될 비경이다. 비렁다리를 지나면 거대한 해안 동굴이 ‘무사히’ 협곡을 건넌 이를 맞이한다.
3코스가 끝나는 학동마을부터 심포마을까지가 4코스(3.2km)다. 거리도 가장 짧고 경사가 완만해 초심자에게 가장 추천할 만하다. 완만한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사다리통 전망대에 도착한다. 이곳의 해안단구는 육중하다. 3코스가 화려하고 날카로웠다면 4코스는 무겁고 평온하다. 매서운 바닷바람도 어느새 잦아든 느낌이다. 절벽 위를 걸을 수 있는 출렁다리가 2024년 개통됐다.
마지막 5코스(3.3km)는 심포마을에서 출발해 섬 남단 장지마을까지 닿는다. 세이버(Saber·날이 휜 기병용 칼) 모양으로 돌출된 반도 지형에 자잘히 쪼개진 갯바위가 인상적인 구간이다. 완주하면 이웃 섬 안도(安島)가 한눈에 들어온다. 안도는 섬 모양이 날개를 편 기러기 같다고 해 ‘기러기섬’으로도 불린다. 금오도와는 연도교(연륙교)로 연결돼 있다. 장지마을 전망대에 오르면 안도의 전경과 탁 트인 남해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이 장관을 끝으로 18.5km 비렁길 종주가 마무리된다.
금오도에 입도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여수엑스포역에서 가까운 여수항을 이용하는 방법, 동남쪽 돌산도 끄트머리 신기항을 이용하는 방법, 서남쪽 백야도 백야항을 이용하는 방법. 백야항은 여수엑스포역으로부터 차량으로 30~40km 넘게 이동해야 하고 배편이 많지 않아 외지인에게 추천되지 않는다. 여수항은 가장 접근성이 좋으나 오전·오후 일 2회만 운항해 여행 계획을 치밀하게 짜야 한다. 신기항은 여수엑스포역에서 20~30km 이동해야 하지만 배편이 가장 자주 있고 항해 시간이 20분에 불과하다. 출도 배편은 섬 동편 여천항을 흔히 이용하나 시간 여건에 따라 1코스 시작점의 함구미항이나 섬 서남편 우학항을 이용할 수도 있다.
섬 내에는 드물게 다니는 마을버스와 단 2대뿐인 택시가 유일한 이동 수단이라 차량과 함께 입도하는 관광객이 많다. 여수항, 신기항발 배편 모두 차도선을 운용해 차량 입도는 수월한 편이다.
■ 365개 섬의 여수여수는 관내 365개의 섬을 품고 있다. 1년 모든 날에 섬 하나씩 엮을 수 있는 셈이다. 금오도를 비롯한 48개 섬이 유인도고 나머지 317개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단순 섬 개수로만 보면 신안군(1025개)과 통영시(570개)가 더 많으나, KTX 직행편이 운행하고 관광 기반시설이 풍부한 여수는 섬 여행을 상대적으로 편하게 즐길 수 있다. 이를 살려 올해 9월 세계섬박람회 개최를 준비하고 있다. 가장 큰 섬이자 육로로 연결된 돌산도가 주행사장, 금오도와 개도가 부행사장으로 선정됐다.
여수 밤바다의 상징인 돌산대교와 거북선대교로 육지와 연결된 돌산도는 국내에서 10번째로 큰 섬이다. 섬의 동남쪽 끝 향일암이 관광명소다. ‘해를 향한 암자’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해돋이가 빼어나다. 대웅전에 오르려면 겨우 한 사람이 빠져나갈 정도로 비좁은 바위틈을 통과해야 한다. 이를 통과하며 속세의 번뇌를 내려놓으라 ‘해탈문’이라 부른다. 여수 곳곳에서 맛볼 수 있는 ‘갓’의 고향이 돌산도다. 본래 여수 돌산갓이 타지의 갓에 비해 맛이 순해 명성을 얻었지만, 어느새 ‘톡 쏘는 맛’이 일품인 특산품으로 변신한 점이 재미있다.
개도는 금오도 북서쪽에 자리한 작은 섬이다. 이름은 ‘뚜껑처럼 작은 섬들을 덮고 있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둘레 10㎞ 남짓한 해안길을 한 바퀴 돌며 걸어보면 주변에 점점이 떠 있는 부속 섬들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조선시대부터 전통으로 내려온다는 개도 막걸리가 유명하다. 부드러운 단맛과 가벼운 탄산, 은은한 산미가 특징인 연한 막걸리다. ‘막사(막걸리+사이다)’나 밀키스(우유맛 탄산음료) 맛이 난다는 평을 받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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