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3년 전 그만두고 은퇴한 한인 이철기(가명·67세)씨는 얼마 전 두 아들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평생 쓰지 않고 힘들게 모아 온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은퇴한 지금부터라도 자녀들이 아닌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살고 싶다는 생각에 내린 쉽지 않은 결단이었지만 다행히 아들들의 반응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이씨는 연금을 합쳐 매달 7,000달러가 넘는 현금 수입이 있고, 은퇴구좌엔 200만달러를 가지고 있다. 이씨는 “돈을 모으기만 했지 나를 위해 돈을 쓰면서 여유롭게 살아보질 못했다. 이제는 해외여행도 다니면서 ‘나만을 위한 삶’을 즐기며 살 작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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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쓰고 간다’
이처럼 이씨와 같이 은퇴를 한 후 인생의 황혼기에 자녀들이 아닌 자신을 위한 삶을 추구하겠다는 한인들이 늘고 있다. 이제 막 은퇴를 했거나 은퇴를 앞두고 있는 소위 ‘베이비부머’세대 한인 노년층에서 재산을 자녀에게 상속하거나 증여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소비하고 지출하면서 ‘한 번 뿐인 삶’을 즐기려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 나타나고 있다.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는데 집착했던 과거 부모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움직임이다. 이른바 ‘욜로 라이프’를 추구하는 노인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욜로(YOLO)’란 ‘You Only Live Once’의 약자로 ‘인생은 한 번 뿐’이라는 뜻.
■한인사회도 ‘쓰죽회’ 바람
이같은 트렌드를 반영하듯 한국에서는 ‘쓰죽회’라는 모임들도 늘고 있다고 한다. (본보 6월3일자 한국판 보도) 이른바 ‘다 쓰고 죽겠다’는 모임이다. 본보 보도 이후 LA 한인사회에서도 ‘쓰죽회’ 결성 바람이 불고 있다. 골프 모임이나 저녁 모임 등에서 ‘쓰죽회’라는 용어가 단연 화제가 되고 있고, 당장 단체 여행을 떠나자는 이야기들도 나오고 있다고 한다. 돈만 쓰는게 아니라 남은 여생을 함께 커뮤니티에 뭔가 환원해보자는 분위기도 있다.
돈 뿐 아니라 살고 있는 집이나 렌트 수입이 나는 부동산까지도 자녀들에게 전부를 물려주지는 않겠다는 한인 노인들도 있다. 공립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퇴직한 70대 한인 강성연(가명)씨는 시가 100만달러 상당의 콘도를 2채 보유하고 있지만 2채 모두를 자녀에게 물려주지는 않을 생각이다. 1채는 자녀에게 물려주겠지만 나머지 1채는 미국 자선단체에 기부할 생각을 하고 있다.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 재산의 절반만 자녀에게 물려주는 셈이다.
살고 있는 집조차 물려주지 않고, 살아 있는 동안 이마저도 모두 쓰겠다는 경우도 있다. 62세가 지나서 은퇴한 노인들이 역모기지(Reverse mortgage)를 이용해 살고 있는 주택의 홈에퀴티를 연금 형식으로 미리 받아 노후 생활자금으로 활용하는 경우다. 한 융자전문가는 “아직 역모기지를 이용하는 한인 노인들이 많지는 않지만, 살고 있는 주택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고, 생활자금으로 활용하겠다는 노인들도 있다”고 말했다.
■‘욜로’ 라이프스타일 노년층에 확산
아끼고 절약하며 평생 힘들게 모은 재산을 자식들에 전부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노년 세대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현상은 특히 막 은퇴를 했거나 은퇴를 앞두고 있는 소위 ’베이비부머‘세대 노년층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은퇴가 빨라지고 수명이 갈수록 길어지면서 자식 보다는 자신의 남은 노후 생활을 행복하게 영위하고 싶은 생각을 갖는 노인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밀레니얼 세대에게서 나타나는 ‘욜로’ 라이프 스타일이 ‘베이비부머 세대’ 노년층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한 번 뿐인 삶의 행복을 내일로 유예하기 보다는 오늘 현재를 즐기며 살겠다’는 밀레니얼 세대의 ‘욜로’ 라이프 방식이 ‘자식을 위해 행복을 유예하지 않겠다’는 노년 세대의 ‘욜로’ 라이프로 진화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노인은퇴 문제 연구소’(IRI)의 조사에서도 이같은 노년 세대의 의식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60대 이상 미국 노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재산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베이비부모 세대 노인은 46%로 나타났다. 절반이 넘는 미국 노인들이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줄 생각이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몇 년 전 이 연구소가 실시했던 같은 조사에서는 60%가 넘는 노인들이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겠다고 했던 것과 비교하면 베이비부머세대 노인들의 의식이 빠르게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은퇴 노인들 ‘블루슈머’ 부상
은퇴한 이후에도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기보다 자신을 위해 지출하려는 노년층이 늘면서 경제적 여유를 갖춘 은퇴 노년층은 소비 시장에서 새로운 ‘블루슈머’로 부상하고 있다. ‘블루슈머’란 용어는 ‘블루오션’에 소비자를 뜻하는 ‘컨슈머’를 합친 것이다. 성인된 이후에도 부모 세대에 기대야하는 밀레니얼 세대들이 지갑을 닫는 사이에 은퇴 이후에 오히려 더 경제적으로 풍족해진 은퇴 노년층이 소비 시장에서 큰 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엔 손자들이나 자녀를 위해 돈을 쓰려던 여유 있는 노년층이 이제는 자신의 건강이나 미용, 패션, 취미 생활에 아낌없이 돈을 쓰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노년층의 소비 부상이 가장 두르러지고 있는 것이 바로 여행업계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여행에 이들 ‘블루슈머’ 노년층은 돈을 아끼지 않는다. 최근 한인 여행사들이 판매하고 있는 5,000달러가 넘는 고가의 패키지 여행상품 고객 대부분은 바로 이들 블루슈머 한인 노인들이 대상이다.
한 여행사 대표는 “5,000달러 이상 되는 유럽이나 남미 일정의 고가 패키지여행 고객들은 80% 이상이 은퇴 생활을 즐기는 여유 있는 노년층”이라며 “여유 있는 은퇴 노년층의 특징은 여행을 새로운 경험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녀 세대는 동상이몽
유산 물려주는데 주저하기 시작한 ‘베이비부머’ 세대 노년층의 달라진 생각은 유산 상속을 기대하는 자녀 세대와의 사이에서 갈등을 빚기도 한다.
상속법 전문 박유진 변호사는 “사업에서 어느 정도 성공해 재산을 축적한 1세대 한인 노년세대의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요즘 실감하고 있다”며 “재산을 물려받을 것으로 기대하는 자녀들과 달리 재산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거나 자녀에게 물려주기보다는 자신이 모은 재산을 쓰겠다는 1세들이 많아져 자녀들과 같등을 빚기도 한다”고 말했다.
재산을 자선단체에 기부하려는 부모에게 반발하는 자녀들도 있고, 부모가 죽기 전 미리 재산을 증여받고 싶어하는 자녀들도 적지 않다. 박 변호사는 “대부분의 2세 자녀들이 부모가 축적한 재산을 물려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베이비부머 세대에 해당하는 1세 한인 노인들의 생각도 예전과는 크게 다른 것 같다.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을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재산을 놓고, 자녀와 부모 세대의 시각차는 미국인 베이비부머 세대에서도 나타난다. ‘나티시스’(Natixis)의 한 조사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에 해당하는 미국 젊은이들은 68%가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기를 원하거나 물려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반면, 그들의 부모 세대들은 40%만이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줄 생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절반이 훨씬 넘는 60%의 부모 세대가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은퇴를 앞둔 부모 세대의 57%는 자녀에게 물려줄 돈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35%는 자녀에게 물려주는 대신 자신이 돈을 모두 쓰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노후 재정 불안감도 이유
‘100세 장수’가 더 이상 놀랍거나 드물지 않을 정도로 수명이 길어져 은퇴 후 노년에 대한 불안이 커진 것도 노년층이 갈수록 재산 물려주기를 꺼려하는 이유 중 하나다. 65세에 은퇴해도 20∽30년 이상 노년을 지속해야 하는 이들은 자녀에게 의지 하지 않으려는 욕구가 크다.
LA 카운티 공무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70대 한인 고수경(가명, 70세)씨의 경우가 그렇다. 40년 가까운 공무원 생활로 100만달러의 재산을 모았지만 이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는 않을 생각이다. 남은 노후를 자식들에게 의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고씨는 “큰 병이 나서 병원비가 수 십 만 달러 필요할 수도 있지 않나. 돈이 얼마나 더 필요할지 몰라 재산을 미리 물려줄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가 재산을 모았지만 재정 문제를 불안해하는 노인들도 적지 않다. 한 조사에 따르면, ‘노년 생활에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한 미국 노인은 2011년 37%에서 2014년 33%로 줄었다. 또, ‘은퇴를 위해 충분한 재정준비를 갖췄다’고 답한 베이비부머 세대 노인도 2011년 44%에서 2014년 35%로 감소했다.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기보다 ‘한 번 뿐인 인생’을 나를 위해 즐기며 살고 싶다는 소위 ‘욜로’족 노년층이 늘고 있기는 하지만 자녀에게 한 푼이라도 더 물려주려고 노심초사하는 노년층도 여전하다. 재산이 많을수록 이런 경향이 크고, 다양한 절세 방법들을 놓고 고심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을 위한 소비나 지출에는 인색하고 이를 힘들어한다.
박유진 변호사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자산가 한인 노인들은 여전히 자식들에게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주는 것을 가장 큰 성취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은 여전히 어려워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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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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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총 7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은퇴 못하는 시대에 살아요
이민자 부의 축척은 1세들이 많이 했고 2세들은 극과극 현상을 보여요.
노인이라 불리는 은퇴연령이 몇살부터일까? 60? 65? 70? 요즘 한인타운 나가보면 40-70대 사람들이 대부분 돈을 쓰고 다니는데 6,70대가 제일 많이 쓰는거같다
쓸돈이 있으면 다행이네요 노년에 돈없으면 답이 안나오지요
빚갑고 죽자는 인간은 없나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