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독광부에서 아메리칸 드림 찾아 LA로…‘자린고비’소리 들어가며 가난 탈출
▶ 고향 학생 도우면서 기부하는 인생 배워

LA 한인 커뮤니티 및 노인센터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고 이사장직에서 퇴임한 박형만 전 이사장이 커뮤니티 환원을 위한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박 상<혁 기자>
지하 1000미터 탄광 속 서독 광부가 시작이었다. 아침 5시부터 밤 12시까지 악착같은 생활이었다. 미국에서의 삶도 역경의 연속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을 먼저 보냈다. 재산이 모이기 시작하자 아파트 관리 부실로 악덕 소유주란 비난을 받았고, 돈 쓸 줄 모르는 ‘자린고비’란 힐난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20년째 고향 공주에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장학금을 줬고, 장애인을 위한 자선 사업에도 아낌없이 사재를 털었다. 감동을 선사하는 기부의 마법 같은 비밀을 알아채버린 순간,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가 바로 한인타운 노인센터 박형만 이사장이다. 어렵기만 했던 노인센터를 4년 만에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고 떠나는 박형만 이사장을 만나 그의 인생 스토리를 들어봤다.
-4년간 헌신했던 노인센터 이사장을 물러난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소회를 말해 달라
많이 허전하다. 허허벌판처럼 텅 빈 건물만 있던 노인센터를 활성화하기 지난 4년간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그간 봉사했던 한인단체들 중 가장 애착이 가고 보람을 느꼈던 곳이 바로 노인센터였다. 착잡하기도 하고,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박수를 받고 떠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정관을 고쳐서라도 임기를 연장해야 한다는 이사들도 있지만 임기를 마치면 미련 없이 원칙대로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
-노인센터가 열기가 대단하다고들 한다. 4년 간 얼마나 달라졌나?
이사장에 취임했던 4년 전만 해도 주위에서 의구심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간 동포사회의 호응과 격려로 노인센터는 한인사회에서 가장 활성화되고 한인 노인들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은 중심단체로 발전했다. 수강생만 매일 500여명에 달하고, 매월 6,000여명의 한인노인들이 오가는, 말 그대로 커뮤니티의 센터로 자리 잡았다. 수강생 100명이 넘는 강좌가 4개나 되고 매학기 마다 수강 신청하려는 노인들로 센터 앞은 아침부터 장사진을 칠 정도가 됐다.
-노인센터 이사장을 하면서 언제 가장 큰 보람을 느꼈나
남가주 한국학원, 코리아타운번영회, 한미동포재단 등 그동안 여러 한인단체들에서 활동했지만 노인센터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 특히, 노인센터 강좌에 참여하는 많은 한인 노인들의 감사 인사를 받을 때 내가 봉사한 보람을 느겼다. 노인 학생들이 책상 위에 떡이나 꽃, 약밥 등을 넌지시 놓고 갈 때면 봉사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했다. 노인센터가 활성화돼 소일거리가 없던 노인들이 매일 배움을 이어가는 것을 볼 때 뿌듯한 마음이 든다.
-한인회와의 갈등, 운영비 조달 문제 등은 어떻게 해결했나?
초창기에는 한인회가 센터 운영권한을 놓고 갈등도 있었다. 하지만, ‘책임 없는 권한은 없다’는 원칙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 있었다. 노인센터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려면 매월 1만 5,000달러 정도의 운영비가 필요하다. 사무실 공간 임대수익과 한인 사회와 학생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부족한 운영비는 사재로 부담해야 했다. 그간 노인센터에 10만달러 정도 기부한 셈이다.
-CRA 지원금 190만 달러 상환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노인센터 건립에 들어간 250만달러 중 190만달러가 CRA 지원금이다. 10년에 걸쳐 상환해야 한다. 노인센터 프로그램이 활성화되면 이를 예산으로 환산해 상계하는 방식이다. 이미 70만달러를 조기에 상환해 LA 시로부터 가장 모범적인 ‘시니어 센터’라는 칭찬을 듣고 있다.
-최근 기부소식이 자주 들린다. ‘사람이 달라졌다’는 소리 듣지 않나
맞다(웃음) 예전에는 너무 돈을 안 쓰고 모으기만 한다고해서 ‘자린고비’란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때는 가난을 벗어나 빨리 돈을 모아야 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20여년전부터 고향 공주에 있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남을 돕고, 기부하는 즐거움을 알게 됐다. 지금까지 학생 800여명에게 장학금 5억 7,000만원을 전달했고, 내가 세운 만희재단을 통해 LA에서도 장애인들에게 매년 기금을 전달하고 있다. 이웃과 나누면 돈도 아름다운 꽃이 된다는 기부의 비밀을 뒤늦게 깨닫게 됐다. 내가 평생 모은 재산을 아름답게 이웃들과 나누면서 여생을 살고 싶다.
-만희재단에 재산 절반을 출연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인가
맞다. 부모님 속만 썩이다 독일 광부가 됐던 것은 어머니를 호강시켜드려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고. 지난 50년간 아끼고 안 쓰고 자린고비 소리 들으면서 돈을 모았던 것은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제는 이웃을 도우면서 살고 싶다. 만희재단을 설립한 것은 평생 모은 재산을 뜻 있는 곳에,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싶어서다. 이 재단에 내 재산의 절반인 약 5,000만달러를 출연해 지속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최근 재단 이름을 ‘만희코쥬재단’으로 명칭을 바꿨다.
-재단 이름에 특별한 의미가 있나
만희는 나와 부인의 이름 글자를 따온 것이고, 코쥬는 ‘코리언 쥬이시’란 의미다. 내가 유태인들처럼 지나치게 검소하게 산다고 해도 젊은 시절 ‘코리언 쥬이시’란 소릴 듣기도 했다. 지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지금 내 차는 20만 마일을 넘긴 쉐비 픽업트럭이다. 총영사 만찬에 갈때도 이 차를 손수 운전한다. 부자가 된 것은 맞지만 근검절약하는 생활습관은 50년 전과 다를 바 없다.
-박 이사장은 ‘아파트 억만장자’라고들 한다. 어떻게 부자가 되었나?
‘고생한 돈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 검소하고 부지런하게 살면서 재산을 모았다. 독일 광부생활을 마치고 LA에 정착한 해가 1967년이다. 올해로 50년이 됐다. 처음엔 험한 일도 마다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돈이 좀 모이자 주유소를 인수한 것이 성공의 발판이 됐다. 1972년 당시 주유소 인수가격이 3000달러였다. 주유소 사업이 성공하면서 허름하고 낡은 아파트를 하나씩 인수해나가면서 재산이 불어났다. 내가 직접 플러밍도 하고 전기수선도 했다. 지금도 홈디포에서 부품을 직접 산다. 그렇게 늘린 아파트가 지금 800유닛 정도 가 된다.
-부자가 된 ‘박형만’은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과거 나는 자린고비였고, 노랭이였다. ‘코리언-쥬이시’란 말을 만큼 짠돌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아니다. 이제 ‘멋있게 사는 사람’이란 말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이다. ‘노랭이가 그간 못 다 갚은 빚을 갚는다’는 자세로 남을 돕는 일에서 희열을 느끼면서 살고 싶다. 지금도 남을 도울 때면 몸이 충전되는 느낌을 받곤 한다. 남을 도울 줄 모르는 부자는 인생의 기쁨을 아직 맛보지 못한 것이다.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한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돈에는 눈이 있다. 고생해서 정성을 들여 번 돈은 쉽게 없어지지 않고 싹을 틔운다. 편하고 손쉽게 돈 벌려고 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약력>
1937년 충남 공주 출생
1964년 독일 광부로 루르엔센 광산 근무
1976년 남가주 서독동우회장
1980년 코리타운번영회 이사장
1988년 남가주 한국학원 이사장
1997년 한미동포재단 이사장
2011년 미주한국문화유산재단 이사장
2013년 한인타운 노인 및 커뮤니티센터 이사장
<
김상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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