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뜰에 나가 화단에 물을 준다. 넓은 호스타 잎에 물이 떨어지면 여름날 함석지붕에 듣는 장마비 소리가 난다. 땅을 덮고 있는 키 작은 풀꽃들에게도 물을 뿌린다. 어느 시인이었나, 그런 풀들이 없는 화단은 겉만 화려하고 속옷은 제대로 챙겨 입지 않은 여자같다고 했었다.
한동안 우리 집에 와서 머무르던 조카는 뜰에서 일하는 내 모습에서 영국에 살 때 늘 정원에서 살다시피 하던 할머니가 연상된다고 했다. 엄마는 오빠네 가족이 영국에 사는 동안 그곳에 가셔서 몇 계절을 지내셨었다. 엄마는 우리가 아직 집을 사기 전 미국에도 오셔서 반 년동안 머물고 가셨는데 뒷마당에 내가 심었던 꽃들과 깻잎들이 엄마가 계시는 동안에 눈에 띠게 싱싱하고 풍성해졌었다. 엄마가 가시고 난 뒤에 뒷마당은 어딘가 빛을 잃고 식물들은 시들해져 갔다.
꽃 가꾸는 일에 게으른 나는 주로 다년생 꽃들을 심어 놓고 최소한의 노력으로 현상유지만 하는 편이다. 지나치게 열심히 꽃들을 키우던 엄마에 대한 방어기제일까. 없는 살림에도 자꾸 꽃화분을 사고 기르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어 엄마가 아직 철이 없는가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서울의 아파트에서도 엄마가 화분을 종종 사들여서 올케언니는 곤란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떠나오며 집에 있던 화분들을 이웃에게 나눠줄 때 엄마는 벤자민 만큼은 당신이 가지겠다고 하셨다. 키가 천정에 닿을 정도로 자라서 마침내 작은 조롱박 모양의 열매까지 열린 벤자민을 엄마는 무척 귀해 하셨다. 그 큰 나무를 운반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다 오빠 식구들이 좋아할 리도 없어 제발 포기하시라고 말렸지만 엄마는 결국 용달차까지 불러서 옮겨 가셨다.
우리가 떠나온 후, 실직한 오빠가 집을 줄여서 이사를 했다. 오빠네의 그 많은 살림살이들을 놓을 공간도 부족한 집에, 벤자민은 다용도실 귀퉁이에서 몸을 구부리고 지내다가 어느 겨울에 그만 얼어 죽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하면서 엄마는 목이 메이셨다. 죽은 벤자민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 인간사의 어쩔 수 없는 부분에 대한 슬픔같은 것때문에 나도 눈물이 났다.
아버지의 병고로 수십년의 신산한 세월이 시작되기 전, 엄마에게는 짧은 동안이나마 정원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동네사람들이 와서 구경하며 젊은 새댁의 부지런한 뜰을 칭찬했다고 한다. 장미넝쿨이 담장위로 넘어가고 작고 동그란 연못 가장자리로 각종 꽃들이 피어있는 속에 엄마와 오빠가 앉아있는 사진을 나도 본 적이 있다. 엄마는 우리가 마당있는 집을 사면 손수 정원을 꾸며주는게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만 정작 우리가 작은 화단이 딸린 집을 샀을 때는 너무 연로하셔서 비행기를 타실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뜰에 서면 새삼 아쉬운 감회에 젖어 엄마와 함께 정원을 만드는 상상을 하곤 한다.
엄마와 나는 서로 등을 돌리고 앉아서 엄마는 과꽃, 봉숭아, 나팔꽃같은 유년의 꽃밭에 있던 꽃들을, 나는 루핀이나 라넌큘러스같은 서양풍의 꽃을 심고 있다. 그리고는 같이 땅을 파서 사과나무를 심고 목백일홍과 라일락을 심는다. 엄마는 포도나무와 등나무도 올리자고 하신다. 내가 오늘은 그만하자고 하면 그래 하시지만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어느새 울타리 아래에 넝쿨장미가 심어져 있다. 내 굼뜬 행동에 엄마는 여느때처럼 잔소리를 하고 나는 늘 그렇듯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른다. 서로 마음이 상한 채 말없이 흙을 파고 꽃을 심다보면 어느새 마음도 흙과 함께 풀어져 있다.
세월이 흘러서 그 정원에 계절마다 꽃들이 피고 지고 벌 나비가 오고 사과가 무르익으며 저녁 바람이 불어와서 향기를 흩날릴 때, 이승에서 엄마와 겪었던 모든 괴로움들도 하나 둘 바람에 날려가 버리지 않을까. 꽃나무 아래 설 때마다 엄마를, 엄마라는 한 사람을, 여자를, 그 여자의 추억과 꿈을 기억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엄마를 이해하고 엄마와 온전히 화해를 하게되는, 그런 뜰을 나는 이제 마음속에서나 가꾸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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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진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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