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욱, 날 보더니 대경실색하며 뒷걸음질쳐
의회 레이번 빌딩에 있는 프레이저 소위원회 사무실.
-김형욱의 뉴욕타임스 회견
내가 코리아게이트에 관여하게 된 건 국무부 통역관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미 의회 산하 연방 리소스 서비스 부서에서 연구원을, 그리고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의 한국 전통문화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전에 대학원에 재학 중인 60년대 중반부터는 국무부의 계약직 통역관도 하고 있었다. 국무부에서는 국무장관 등 고위인사들의 통역, 한미 조약 협상의 통역, 또 양국 주요 외교문서의 검증, 때로는 서울이나 평양과 워싱턴과의 비밀교신도 검토했다.
1977년 6월 어느 날이었다. 초여름의 내셔널 몰은 국내외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볐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뉴욕타임스 회견 뉴스로 워싱턴은 시끌벅적했다. 김형욱은 기자회견에서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하면서 코리아게이트 문제도 언급했다. 그리고 자신이 코리아게이트 조사에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미 조야는 미군 철수 의제는 무시하고 코리아게이트에 관해 그가 표명한 내용에만 관심을 집중시켰다. 박동선 스캔들의 내막을 누구보다 잘 아는 KCIA 총책인 그의 등장은 오리무중 상태이던 코리아게이트 조사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모든 사태가 백일하에 드러나는 듯이 보였다.
-내셔널 공항에서 만난 사내
뉴욕타임스 보도가 난 며칠 뒤였다. 국무부에서 전화가 왔다.
“안 선생. 의회의 어떤 부서에서 아주 예민한 사안이 있다는데 통역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가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코리아게이트와 관련된 통역임을 직감했다. 야릇한 흥분감에 휩싸였다.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나는 “오케이”하고 응답했다.
“내셔널 공항으로 가십시오. 노스웨스트 항공사 로비에 가서 팔 밑에 잡지를 들고 있는 사람을 만나세요.”
국무부 직원의 지시사항은 마치 007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내셔널 공항은 당시만 해도 규모가 작았다. 노스웨스트 항공사 로비로 가니 잡지를 끼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안입니다.”
“아 예. 저는 의회 윤리위원회 특별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야 하는데 안 선생이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그 순간, 내가 만나야 할 인물이 김형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혹시 김형욱입니까?”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입을 닫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사내는 FBI에서 윤리위 특검팀으로 파견된 수사관 해리(Harry) G.이었다. 그의 부인도 역시 특검팀의 검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뉴저지 모텔에서 김형욱 만나다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뉴저지의 뉴왁 공항에 내렸다.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따라나선 길이었다. 그는 공항에서 어디인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렌터카 업체에서 차를 빌려 타고 우리는 목적지도 모른 채 출발했다.
그 수사관은 다시 공중전화로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우리가 만나려는 상대방은 마치 유괴범이 자신의 행적을 감추려는 듯이 보였다.
해리 G.는 또 누구와 다시 공중전화를 했고 마침내 우리는 뉴욕과 뉴저지의 접경에 있는 어느 모텔로 차를 몰아 들어갔다. 목적지에 온 것이다.
어느 2층 방 문 앞에 섰다. 이 모텔의 방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 대한 묘한 호기심과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문이 열리자 나는 뒤를 따라 바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남자 둘이 있었다. 한 사내와 미디어에서 사진으로 접했던 그 남자, 바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었다.
나를 본 순간 김형욱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하면서 의자를 밀며 뒷걸음쳤다. 얼굴에는 공포에 질린 대경실색한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속으로 “이 자가 뭘 두려워하고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평생을 군과 정보 업무에 종사해온 그였다. 사전에 이야기가 없던 한국인이 나타나자 자신을 죽이러 온 암살자로 알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6년 동안 키워온 중정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정보부의 실력을 과대평가하는 것도 같았다.
그가 몇 차례나 장소를 바꿔가며 우리를 오게 한 것도 암살위협 때문에 미행자를 따돌리려는 수법이었다.
해리 G.가 그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세요. 우리 측 사람입니다.”
김형욱은 계면쩍게 웃으며 비로소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옆에 있는 사내는 그의 인척인 김영길이라고 했다. 평소 김형욱을 수행하며 개인 통역관 역할도 하고 있었다.
김형욱의 첫 인상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막강한 중앙정보부장의 풍모는 아니었다. 작은 키에 뚱뚱한 체형… 007 영화 같은데서 등장하는 엄중한 정보 책임자의 모습이라기보다 시장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장사치 같은 느낌을 주었다. ‘돈가스’라는 그의 별명이 실감났다.
의회 특검팀 수사관과 김형욱의 대화가 시작됐다.
“윤리위에서 박동선 사건의 조사를 하고 있는데 협조할 용의가 있습니까?”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내가 다 알고 있습니다. 모든 걸 다 이야기하겠습니다.”
“박동선은 우리(정보부) 직원은 아니었지만 우리 통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김형욱은 의회 조사에 순순히 협력해주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팅은 길지 않았다. 김형욱이 의회에서 부르면 언제든지 출석하겠다고 약속하며 20분 만에 끝났다.
-박사냐, 장군이냐? 김형욱의 호칭
얼마 뒤였다. 프레이저 위원회에서 나를 찾았다. 6월22일에 김형욱이 청문회에서 증언을 할 건데 통역을 맡아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즉각 수락했다.
청문회 준비를 위해 프레이저 위원회 조사팀장 바브(Bob) B.를 만났다. 내가 김형욱의 호칭을 어떻게 부를 것인지 물었다.
“김형욱이 자신을 닥터(박사)라고 불러달라고 했어요.”
김형욱 박사? 암만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김형욱은 1969년 우석대와 경희대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를 박사라고 부르면 한국 전체가 웃을 것이고 프레이저 소위도 놀림감이 될 것이 뻔했다.
나의 설명에 조사팀장은 “그럼 무엇이라 부르는 게 옳을까요?”라고 되물었다.
“그가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으니 장군으로 부르는 게 어떻겠소?”
나의 제안에 스태프들도 수긍했다.
“그럼 장군으로 부르기로 합시다.”
김형욱의 호칭은 그 후 의회에서 ‘제너럴(장군)’으로 통일됐다.
청문회를 앞두고 프레이저 위원장이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당신은 어느 쪽도 아니다. 김형욱 편도 아니고 한국 편도 아니다. 그렇다고 미국도 아닌, 완전히 중립적 위치에서 통역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통역인 내가 견지해야 할 위치를 법적으로 명확히 해두려는 것이었다. 그는 나의 비밀 준수 의무도 지적해주었다.
-김형욱과 문명자의 언쟁
역사적인 청문회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의회 조사팀에서 내게 “김형욱이 워싱턴 지역에 와 있다”며 만나보라고 했다. 청문회를 앞두고 미리 손발을 맞춰보라는 것이었다.
김형욱은 그날인 6월21일 낮에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리고 의회에서 20분 거리인 버지니아 비엔나의 123 도로에 있는 할러데이 인 모텔에 투숙하고 있었다. 오후 늦게 1층에 있는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마침 그는 혼자 있었다.
김형욱은 청문회장에서 낭독할 증언 원고를 한글로 준비해 왔다.
“안 선생. 이걸 내일 청문회에서 영어로 읽어주시오.”
그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타난 인물은 뜻밖에 문명자 기자였다. 김형욱도 그랬지만 나도 놀랐다.
김형욱의 은신처는 의회 조사관들 밖에 모르는 비밀이었다. 그런데 기자가 그 은신처를 알고 들이닥친 것이다. 짐작 가는 건 있었다. 문 기자는 프레이저 위원회 참모들과 정보를 주고 받으며 관계를 맺어왔다. 물론 엉터리 정보를 물고 와서 가끔 조사관들을 혼란에 빠트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김형욱과 문명자는 대뜸 언쟁부터 벌였다. 주미대사관의 KCIA 요원인 김상근의 망명을 누가 시켰느냐를 놓고 말씨름을 벌인 것이다.
“김상근은 옛날 내 부하요. 나한테 모든 걸 상의했고 내가 망명 주선도 했소.”
김형욱에 맞서 문 기자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아니야. 김 부장. 내가 망명하도록 해줬단 말이오.”
두 사람이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에 끼어들기 싫어 나는 슬그머니 방을 빠져나왔다. 훗날 나를 만난 문명자는 “내가 김상근을 망명시켰다”고 다시금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혀보다 더 달콤한 것도, 더 쓴 것도 없다.”는 불가리아 속담이 떠올랐다. 자리에 누웠지만 내일로 다가온 청문회 생각에 깊은 잠이 오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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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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