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이상한 시기를 살고 있다.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 이끌어야 할 무리를 두려워한다. 교수들은 학생들이 무섭다고 한다. 편집장은 하급 직원들의 분노에 전전긍긍하고, 기업 CEO는 스탭의 공개적인 반발을 걱정한다. 그런가하면 중견 정치인들은 같은 편에 속한 신참들의 눈치를 살핀다.
그렇다고 두려움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뉴욕에 선거구를 둔 조 크라울리와 엘리엇 엥겔 전 하원의원은 예비경선에서 패기만만한 신예들에게 일격을 당하고 침몰했다. 당의 현역 중진이었던 이들은 풋내기 도전자들을 얕잡아보고, 무시했다. 골드만 삭스의 젊은 직원들은 다채로운 학대로 얼룩진 주당 100시간의 살인적 근무시간에 시달리다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절대 권력을 틀어쥔 이란의 지도자들은 보란 듯 거리 곳곳에서 히잡을 벗어 불태우는 당찬 여성들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두려움은 심각한 피해를 수반한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킨 사람들과 이로 인해 겁에 질린 사람들 모두가 피해를 입는다. 물론 그들이 속한 사회의 안녕도 영향을 받는다. 건강한 사회에서 지도자들이 해야 할 역할은 장차 그들이 속한 집단의 미래를 개선해 나갈 수 있도록 차세대 젊은이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비겁한 지도자들은 거듭된 책임회피로 물불 가리지 않는 신참들의 방화를 자초했다.
필자는 최근 몇 년 동안 이 문제에 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분노한 무리 앞에서 조직의 지도자들은 원칙을 내팽개친 채 선량한 사람들을 희생 제물로 내주었다. 지난주 마조리 테일러 그린은 뉴욕 공화당 청년당원 모임에서 자신과 스티브 배넌이 지난 1월6일 발생한 의사당 난동사건을 조직했다며 “그때 우리가 이겼어야 했다. 당연히 (참가자들을) 무장시켰어야 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녀의 발언에 민주당은 발끈했지만 하원의장직에 오르기 위해 그린의 지지가 절실했던 케빈 매카시는 굳게 입을 닫은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녀의 발언을 둘러싼 파문이 커지자 그린은 집회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농담 삼아 던진 말을 백악관이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해명했다.
한편 공화당 지도자들과 보수 평론가들은 의사당 난동사태 전후 수년간 도널드 트럼프의 폭언에 침묵했듯 이번에도 대체로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린이나 트럼프를 비난하면 그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관심을 증폭시켜 오히려 둘을 돕는 셈이 된다.” 그러나 공화당 지도부와 보수인사들은 그린과 트럼프에 대한 비난을 자제할 경우 두 사람의 손에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정통성과 권력을 한꺼번에 쥐어주게 된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사악한 광대가 지니는 문제는 사악하다는 게 아니다. 그들이 곧 허물처럼 벗어던질 광대스러움 (clownishness)이다.
이건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중앙 유럽의 공산주의 독재자들은 민주적 규칙을 따르는 척 하다가 권력을 잡기 무섭게 허물을 벗고 본색을 드러냈다. 나치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권력을 틀어쥐었다. 나치당원들은 그들이 파괴하기로 작정한 조직에 가입했다. 그런데 조직의 수문장 역할을 담당해야 할 사람들은 그들의 합류를 허용했고, 심지어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1958년에 나온 막스 프리쉬의 희곡 “비더만과 방화범”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있다. 주인공인 고트리브 비더만은 자기만족에 빠진 사업가다. 어느 날 그는 신문을 읽다가 다락방에서 하룻밤만 묵게 해달라고 간청해 집 주인의 허락을 얻어낸 뒤 집을 잿더미로 만드는 방화범들에 관한 기사를 접하게 된다.
어느 날 바로 그 방화범들이 비더만을 찾아온다. 굽실대는 태도와 알 듯 말 듯 미묘한 협박을 뒤섞어가며 비더만의 도덕적 허영심에 호소한 방화범들은 무난히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간다. 감춰진 내면의 죄의식을 키워가며 공공연한 대립을 두려워하는 비더만은 방화범들의 이상적인 표적이다. 희곡의 끝머리에 비더만은 방화범들에게 자신의 집을 불지를 성냥을 건네준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상황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자신이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점 또한 전혀 깨닫지 못한다.
오늘날의 방화범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방화범은 트럼프, 그린과 블라디미르 푸틴만이 아니다. 대표성, 지속가능성, 감수성과 ‘도덕적 명료성’ 등과 같은 더 높은 사회적 목표를 앞세워 대학과 업계, 출판사와 언론매체에서 거의 공개적으로 지적 탁월함, 수익성, 표현의 자유, 객관성 등을 갉아먹는 이념 사업가들 또한 방화범들이다. 그들의 목표는 주택을 개선하는 게 아니라 통째로 날려버리는 것이다.
이보다 더 어려운 도전은 오늘날의 비더만을 알아내는 것이다. 학문의 자유를 신봉한다던 대학 총장은 태도를 바꿔 종신 교수의 커리어를 끝장내는 방화범들의 대열에 합류한다. 활발한 토론의 가치를 믿는다던 잡지 편집장은 반대편에 선 사람들의 아우성에 굴복한다. 의사당 난동사태 이후 이제 더 이상은 안 된다고 말했던 공화당 하원의원이 과거는 이제 그만 흘려보내자며 딴청을 피운다.
이들은 오늘날의 미국 사회에서 조직생활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자기기만적인 약골 가운데 일부다. 바로 이것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이다.
브렛 스티븐스는 2017년 4월부터 뉴욕타임스의 오피니언 칼럼니스트로 글을 써왔다. 2013년 월 스트릿 저널에 쓴 해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예루살렘 포스트’의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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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렛 스티븐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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