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수기에 또 불이 꺼졌다. 벌써 몇 번째인가. 고친 지 몇 달 되지 않았는데. 전화를 해서 기사를 불렀다. 이리저리 점검을 한 그는 기계가 너무 오래되어 교체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이제 겨우 4년 되었는데 무슨 말이냐는 내 반응에 자기도 잘 모르겠다며 발뺌이다.
할 수없이 온수기를 만든 회사에 전화를 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기계 시리얼 넘버를 확인하더니 아직 워런티가 남아있다는 반가운 대답이 왔다. 부품은 무료 제공이고 인건비만 부담하면 된다고 했다. 진작 여기로 전화를 해볼걸. 손 쉽다고 한국 사람만 찾다보니 정확한 진단도 못 내리고 비싼 수리비만 물고 있었다.
드디어 오늘 흑인 수리기사가 왔다. 공구 가방을 든 그의 뒤로 졸래졸래 작은 여자 아이가 따라 왔다. 아이와 함께 일터를 다니는 게 아주 익숙한 모양새다. 남자도 미안한 기색이 없고 아이도 쭈빗거림이 없다. 아, 아이가 방학이라서 데리고 왔구나. 베이비시터가 없구나. 엄마도 일하러 갔을까? 아니, 싱글 대디인가? 혼자 이런저런 상상을 한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집에서 편안히 지낼 아이가 먼지 풀풀 나는 고물 트럭을 타고 따라다닌다는 것이 안쓰러운 건 사실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반가운 표정으로 아이의 이름을 물었다. 소피아라고 했다. 나이는 일곱 살.
남자는 아이를 곁에 앉혀두고 공구 가방 안에서 이것 찾아줘, 저것 찾아줘. 하며 자꾸 심부름을 시킨다. 아이는 신이 나서 나사못을 집어주기도 하고 망치를 주기도 한다. 우리 집 온수기 앞은 장난감이 마구 흩어진 신나는 놀이터가 되었다. 시간이 더디 가든 말든 이번에는 아이에게 나사 하나를 돌려보라고 한다. 자기 손의 두 배나 되는 드라이브를 양손으로 감싸 쥐고 낑낑대는 아이의 손을, 남자가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며 같이 돌려준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나사못이 박히자 아이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눈을 맞추며 미소 짓는 남자. 손으로 마음으로 딸을 포근히 덮어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 능력 있는 사회인, 좋은 남편, 따뜻한 아빠. 사람마다 살아가는 모양이 다르지만 어떤 경우에도 아름다워 보이는 풍경이 있다. 자기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성실. 바로 그것이다.
성실이란 화려하지 않아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힘이다. 삶은 각기 다른 방향과 속도로 흐르지만, 성실은 어둡고 서걱거리는 삶 속에서도 변치 않는 빛을 발한다.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새벽부터 준비하는 수고, 아이를 잘 키우려고 애쓰는 부모의 손길,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고민하는 예술가의 노력. 이 모든 것은 단순히 맡은 일을 해내는 것을 넘어 자신의 삶에서 책임을 다하는 성실이지 않은가. 공자의 제자인 증자는 어머니를 지극히 존경하며 살았다.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자신을 키운 어머니의 성실을 보고 자랐기에 많은 제자 중에서도 성실과 경건의 모범이 되었다. 부모의 성실은 단순히 자녀를 돌보는 것을 넘어 삶의 본보기가 되는 깊은 의미를 가진다. 어떤 자리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법을 가르치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교훈이다.
남자는 일을 잘 마쳤다며 사인 할 종이를 내게 디밀었다. 차에 타라는 아빠의 시늉에 폴짝 팔에 매달리는 딸을 두 팔로 감싸 안는 그의 눈이 깊고 그윽하다.
나는 떠나가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아가씨가 된 소피아를 파란 하늘에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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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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